루시 쿡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암컷들』
과학의 한 가지 중요한 신조는 '오컴의 면도날'이라고도 알려진 간결성의 원칙이다. 가장 간단한 것이 가장 최선이라는 전제하에 과학자들에게 증거를 신뢰하고 가장 단순한 설명을 선택하도록 가르치는 방법론이다. 하지만 다윈이 엄격하게 못 박은 성역할 덕분에 과학자들은 이런 기본적인 태도마저 포기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암컷의 행동을 설명하자면 더 길고 복잡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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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쿡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암컷들』
다윈 이후의 생물학자들은 다윈의 굴레 안에서만 존재했다. 다윈의 대단한 명성은 감히 그의 이론을 넘어서는 것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들었고, 다윈의 영역을 벗어난 실험 결과들은 버려지거나 곡해되었다. 다윈은 남성 중심으로 성을 읽었고, 그것은 남성 우월주의 문화가 만연한 빅토리아 시대에 걸맞는 것이기도 했다. 동물의 암컷은 빅토리아 시대의 소외된 여성처럼 제대로 연구되지도, 이해받지도 못했다.
우리는 진화생물학자들에게 흥미진진한 시대를 살고 있다. 성선택은 커다란 패러다임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실험으로 폭로된 내용이 기존에 수용된 사실들을 뒤엎고 개념의 변화는 오랫동안 고수되어온 가정들을 밀어내고 있다. (p32)
실험 결과 그대로를 직시하고 반영하는 객관화된 모습, 확증편향에서 벗어나 '사실'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자세. 지금껏 생물학자들은 그런 단순한 과학적 기본 태도조차 갖추지 않은 채 가부장적 관점을 유지해왔다. 저자는 다윈으로부터 시작된, 진화에 기여하지 못하는 수동적 암컷의 이미지를 부순다. 세상의 다양한 암컷들을 현장에서 관찰하고 기록하며 엄연히 존재하는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편견에서 훌쩍 벗어난 암컷들의 실제 모습을 펼쳐 보인다. 신체적, 정치적으로 수컷을 지배하는 여우원숭이 암컷, 사냥 집단을 이끄는 지혜로운 리더인 늙은 범고래 암컷, 알파 암컷에 의해 잔인하게 통제되는 미어캣 사회, 모계 중심의 평화로운 유인원 보노보 사회 등등. 이외에도 다양한 암컷 리더들의 사회와 그들의 적극적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암컷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라는 가부장적 이론을 강력하게 반격한다.
성이란 이원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현상으로서 진화의 변덕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모호한 경계를 지닌다 (p420)
수컷에게 정자를 기증받아 다른 암컷과 짝을 짓고 새끼를 키워내는 알바트로스의 동성 커플, 수컷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암컷들만 모여 복제하며 살아가는 매끈비늘도마뱀붙이, 암컷으로 태어나 살다가 나중에 일부가 수컷으로 변하는 무지개양놀래기, 수컷으로 시작해 암컷으로 바뀌는 '니모를 찾아서'의 주인공 흰동가리. 이처럼 환경의 변화를 인지할 때 성전환이 일어나는 경우를 포함해 자연 속의 성은, 방대한 다양성을 보이며 이원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유동적'이다. 편향에서 벗어난 더 많은 연구의 축적이 어쩌면 LGBTQ(성소수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웅을 전혀 별개의 생물학적 실체로 생각하는 대신 동일 종의 일원으로서, 번식과 관련된 특정한 생물학적 생리적 과정에서만 유동적이고 상보적으로 차이가 날 뿐, 그 외에는 거의 같은 존재로 보아야 한다. (p437)
암컷과 수컷은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더 많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들은 그 차이에 주목하고 차이를 극대화하며 전형화했다. 그리고 그 전형적 상태에서 벗어난 변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외면해왔다. 전형화된 이론은 인간 사회의 한 성을 향한 일방적인 억압을 정당화했다. '진실은 수컷과 암컷이 서로 다르기보다 비슷한 점이 더 많다'(p435)는 것이다. 증거를 신뢰하고 가장 단순한 설명을 선택할 때, 길고 복잡한 변명은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