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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Sep 04. 2024

날카롭게, 때론 멀리 보기(1)

김훈의 허송세월 1(~48쪽)

프롤로그의 제목이 ‘늙기의 즐거움’이지만, 내용의 무게에 비해 즐거움이란 낱말은 좀 가볍다. 치열하고 역동적이던 젊음과 노동의 시간에서 비켜선 노년의 작가는 이제 세상을 단순하게, 그러나 가볍지 않은 풍경으로 관조하고 있다.      


가장 매혹적인 건 관찰하는 작가의 눈이다. 작가는 동양 산수화를 들여다보며 혹은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이들과 젊은이와 까치와 거북을 살피며, 늘 보던 것들을 처음인 듯 보게 되는 자신을 반가워한다.      


또한 젊은 시기를 함께 지나온 담배와 술에 대한 문장들도 철학적이다. 막걸리는 생활적이고 와인은 몽환적이며 소주는 쓰라린 세속성의 술이고 사케는 나이 든 사람의 술, 위스키는 개인의 술이라는 평가도 동의할 법하다. 술과 멀어졌지만 아직 술을 끊은 건 아니라는 작가의 말은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말만큼이나 애절하다.(ㅎㅎ)     


젊음의 몸으로 아수라의 세상을 다 지나온 작가는, 나무 꼭대기에 앉아 말을 거는 까치와 낯가림 없는 철새와 바위에 올라 볕 쬐는 거북에게 눈을 주며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부릴 수 있는 단어가 줄어듦에 슬퍼하지 않고 그저 가난하게 살면 된다고, 작가로서의 욕심마저 내려놓는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거북에 대해 묘사한 부분이다. 

“거북들은 좌선하는 승려처럼 고요히 앉아서 작은 눈을 꿈적이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거북과 나는 햇볕 속에서 마주친다.”(p46)

동양 산수화 속 '화면의 아래쪽에 숨기듯이 배치된' 인간의 마을에 사는 자그마한 존재인 사람과 또 다른 존재인 거북은 서로를 응시한다. 햇볕을 쬐며 허송세월한다는 작가와 지금 바위 위에 올라 볕을 쬐는 거북은 존재의 무게가 동일하다. 그것이 인간과의 부대낌에서 놓여난 나이 든 작가의 담백한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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