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허송세월 9(288~332쪽)
“꽃 핀 나무 아래서는 먼 슬픔이 더욱 날카롭다.”(p311)
1. 잠깐 내린 비에 쏟아진 꽃잎을 발치에 눕힌 채, 둥치가 젖은 나무는 검게 반짝인다. 흠씬 솟은 땀에 열이 내려, 문득 잠에서 깬 미등교의 한낮. 볕은 마당 가득 내려앉고, 천지간 홀로인 듯 괘종시계만 덩덩, 빈집을 울린다. 아랫목엔 상보 덮은 죽 그릇 하나. 몸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마당을 채운 순한 볕을 내다보며, 지난여름 큰물이 진 후 끝내 돌아오지 않은 반 친구의 빈 의자를 떠올렸다.
2. 가난한 일상에 모멸이 친근했던 시절. 그때의 아이들도 금력의 위세를 느끼며 컸다. 자본의 세계는 한 번도 허술한 적이 없었으니. 시골 학교는 순박한 아이들로 가득했으나 차별과 폭력에 무심했다. 학교 안 어른들은 아이의 가난을 연민하지 않았고, 자본 앞에 같은 모양으로 잔인했다.
나는 오래된 기억들을 바라보며, 무감각은 죄악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