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소록 Sep 23. 2024

고통이 위로가 되는 역설

아고타크리스토프   『문맹』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p97)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한겨레출판


국경의 밤은 어둡다. 탐조등이 어둠을 찢으며 지나고 뭔가 터지는 소리, 총소리가 울린다. 소리가 지나면 다시 칠흑 같은 어둠과 정적이 내려앉는다. 넉 달 된 어린 딸은 아빠 품에 안겨있고, 스물한 살의 그녀는 아기용품과 사전이 든 가방 두 개를 든 채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난민이 된다. 그녀는 이날을, 자신의 작문 노트와 처음 쓴 시와 가족과 그리고 헝가리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마저 완전히 잃어버린 날로 기억한다.  


그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35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빈곤 속에 성장한다. 결혼 후 정치적 이유로 남편, 딸과 함께 1956년 스위스의 뇌샤텔로 이주한다.


집과 가족을 떠나고, 모국어를 잃고, 성인기에 다시 문맹이 되는 사람들. 제자리가 아닌 곳에 잘못 놓인 사물처럼 (말과 글을 잃은 채) 낯선 어딘가에 덩그러니 놓인 사람들. 

'재일 조선인 디아스포라'라는 경계적 인간으로 살아온 서경식 교수는 '인간이 타자의 고난에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1)*를 이야기한다. 스위스인들의 위로와 아름다운 스위스의 풍광 가운데서도 그녀는 사막을 떠올린다. 어떤 이들은 끝끝내 사막을 건너지 못한다. 징역형이 예견되는 고국으로, 혹자는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모든 걸 버렸지만 읽기와 쓰기의 통로만은 잃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조국을 떠날 때 사전을 챙겼다. 스위스에서 작가가 되고 싶은 그녀의 희망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결국 그녀는 새로 배운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된다. 그녀의 소설은 최소한의 문장으로 창조되고, '암시와 공백' 2)*으로 완성된다.  


모국어로 말하고, 최초로 익힌 문자로 쓸 수 있는 축복을 자주 잊는다. 나를 둘러싼 온갖 책들을 익숙한 문자로 능숙하게 다 읽을 수 있는 자유를 큰 기쁨 없이 누린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을 읽으며 나의 읽기와 쓰기를 돌아본다. 축복과 기쁨을 잊지 말자고, 그침 없이 읽고 지치지 말고 쓰자고.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3)*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은 그녀의 고통이 배어 있는 글이기에 힘을 갖는 건지 모르겠다.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위로가 되는 역설. 그런 역설이 곧 문학의 힘일 것이다.


*단문 속에 응축된 그녀의 이야기는 읽는 이를 서늘하게 할 만큼 날카롭다. 세상의 이면과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녀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냈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과 『어제』, 『아무튼』등의 작품에서 그녀 고유의 단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작가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최소한의 문장으로, 가장 강렬한 감정을 창조하여 독자를 베어버린다." 4)*라고 평했다.


* 1) 『시의 힘』, 서경식, 현암사

* 2)  「누군가의 모국어와 나의 모국어 사이에서」, 백수린

* 3) * 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한겨레출판  

매거진의 이전글 "돌아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