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소록 Sep 22. 2024

"돌아와!"

하 진의 『멋진 추락』

"하지만 그는 사랑이라는 건 타인이 베푸는 호의처럼 어느 순간에 없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p24)


『멋진 추락』, 하 진 지음 

  

*작가 하 진은 1956년 중국 랴오닝 태생으로,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어로 작품을 써서 펜 헤밍웨이 문학상을 시작으로 다양한 수상을 하며 미국 문학의 흐름에 당당히 합류했다.     


이 책의 두 번째 단편 <작곡가와 앵무새>를 읽으며, 백수린 작가의 단편 <아주 환한 날들>이 떠올랐다.

두 작품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주인공과 앵무새와의 관계에 관한 글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처한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 탓에 앵무새와의 첫 만남에 시큰둥한 주인공의 모습이라든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좁혀지는 앵무새와의 거리, 관계의 깊어짐, 그리고 최후의 이별까지. 두 작품은 많이 닮았다.     


백수린은 노골적인 끝맺음을 선택했다.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중)   


앵무새가 떠나자 주인공은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지난 앵무새와의 시간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하진의 단편 <작곡가와 앵무새>는 '사랑'이라는 낱말을 꺼내지 않는다.

   

판린이 못 알아들은 것을 눈치라도 챘는지 새는 말을 반복했다.
"기분이 어때요?"
판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괜찮아."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데빈은 밖으로 날아가더니 반쯤 열린 창문에 앉았다. 춤을 추려고 하는 것처럼 흰 커튼이 바람에 나부꼈다. 플라타너스 잎들이 바스락거렸다.
판린이 소리쳤다.
"돌아와!"
(p41)


  주인공 판린은 첫 앵무새 '보리'가 죽은 뒤 선물 받은 새로운 앵무새 '데빈'에게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새가 날아가 버리길 바라며 창문을 열어둔다. 그러나 어느 날 앵무새가 실제 날아가 버릴 듯한 모습을 보이자 주인공은 급히 돌아오라고 소리친다. 결국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고 만 것이다. 사랑에 죽을 듯 상처받아도 또다시 사랑으로 되돌아가고야 마는 인간의 모습이 "돌아와!", 이 한 마디 외침에 다 들어있다. 굳이 '사랑'이라는 낱말이 필요 없는 마무리다. 


*이 책의 번역자 왕은철은 <옮긴이의 말>에 작가 하 진과의 인터뷰에 대해 전한다.

"글쓰기가 고통일 수 있지만 자신에게 그것은 견뎌내야 하는 일종의 실존"이라는 작가의 대답을 들었을 때, 숙연해졌노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펼쳐진 것과 펼쳐질 것들 사이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