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소록 Sep 21. 2024

펼쳐진 것과 펼쳐질 것들 사이에서

안희연 시집 『당근밭 걷기』

"그러니까 계속 걷자. 당근의 비밀을 함께 듣자."(시인의 말 중에서)


*안희연 시집 『당근밭 걷기』, 문학동네, 2024


* 『당근밭 걷기』 시집의 여기저기서 따온 문장들을 조합하고 수정하여 써본 글입니다.

 


해는 서쪽, 흔하디 흔한 방향으로 진다

흰모래사장에 들개처럼 서서 바라보는 석양     

나는 최초의 담벼락을 떠나지 못한 채

내 안 가득 깨질 마음을 산처럼 쌓아둔다    

 

꿈에서 깨어나도 여름

깊은 물속에 나를 두고 와도 여름      

신발을 벗어도 길은 끝나지 않고

가랑비에도 발이 퉁퉁 붓는 세계     

이 누수를 멈출 수 없다

나의 범람을 끌어안아도

결국 나는 쪼개져 붉음을 들킨다

    

너는 나의 가장 무른 부분

내 안에 네가 솟아올라

나는 높다

그런데 너는 도처에 문이 있는 세계에

나를 남겨둔다

     

건너왔다는 건

두 번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


나는 나를 자꾸 쪼개본다

거울 속에는 더는 꺼낼 얼굴이 없다    

 

검은 밤

밖을 보려면 창문에 비친 나부터 봐야 하는 시간

밝기만 한 사람은 무섭다     


월담을 꿈꾸는 발꿈치

발만 혼자 도망치는 숱한 밤

언제나 말할 줄 모르는 것들에만 말을 걸며

잎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귀가 아프다

     

출발하기 좋은 자세로

신발을 돌려놓고

이제 나는 먼 것을 멀리 두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시인과 함께 세상을 걸으며 당근의 비밀을 함께 듣고 싶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경성_ 천재들은 어디로 갔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