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시집 『당근밭 걷기』
"그러니까 계속 걷자. 당근의 비밀을 함께 듣자."(시인의 말 중에서)
*안희연 시집 『당근밭 걷기』, 문학동네, 2024
* 『당근밭 걷기』 시집의 여기저기서 따온 문장들을 조합하고 수정하여 써본 글입니다.
해는 서쪽, 흔하디 흔한 방향으로 진다
흰모래사장에 들개처럼 서서 바라보는 석양
나는 최초의 담벼락을 떠나지 못한 채
내 안 가득 깨질 마음을 산처럼 쌓아둔다
꿈에서 깨어나도 여름
깊은 물속에 나를 두고 와도 여름
신발을 벗어도 길은 끝나지 않고
가랑비에도 발이 퉁퉁 붓는 세계
이 누수를 멈출 수 없다
나의 범람을 끌어안아도
결국 나는 쪼개져 붉음을 들킨다
너는 나의 가장 무른 부분
내 안에 네가 솟아올라
나는 높다
그런데 너는 도처에 문이 있는 세계에
나를 남겨둔다
건너왔다는 건
두 번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
나는 나를 자꾸 쪼개본다
거울 속에는 더는 꺼낼 얼굴이 없다
검은 밤
밖을 보려면 창문에 비친 나부터 봐야 하는 시간
밝기만 한 사람은 무섭다
월담을 꿈꾸는 발꿈치
발만 혼자 도망치는 숱한 밤
언제나 말할 줄 모르는 것들에만 말을 걸며
잎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귀가 아프다
출발하기 좋은 자세로
신발을 돌려놓고
이제 나는 먼 것을 멀리 두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시인과 함께 세상을 걸으며 당근의 비밀을 함께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