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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Nov 03. 2024

배꽃, 그늘지던

-어린 기억

비에 젖은 배나무 가지가 검게 빛났다.


비 그친 오후,

볕은 더욱 또랑또랑 익고

엄마의 노란 머릿수건은

텃밭 가운데 재게 움직였다.


배나무 가지 사이사이로

쪼개진 볕이 사금파리처럼 쏟아졌다.


나는 배나무 둥치 곁에 서서

흰 눈처럼 흩어진 배꽃을 헤아렸다.



*뒤뜰에 오래 묵은 배나무가 서있는 집에서 어린 시절 한 때를 보냈다. 배꽃이 필 때면 등을 켠 듯 환해지던 뜨락. 비 온 뒤면 흰 눈처럼 쏟아진 배꽃이 아쉬워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봉지를 주렁주렁 매달고 내밀하게 단 열매를 키우는 배나무의 모습은 말없이 열일하는 일군처럼 든든했다. 하지만 오후 빛이 배나무 가지 사이사이로 비스듬히 쪼개져 비껴드는 시간이면 어쩐지 늠름함 대신 이유 모를 쓸쓸한 정취가 풍겼다. 장에 가신 엄마를 기다리며 떨어진 배꽃을 헤아리다, 쪼개진 빛에 베인 듯 마음이 쓰려 혼자 훌쩍이기도 했다.


엄마는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지 않았다. 엄마가 그냥 무료하게 앉아 쉬거나 낮잠을 자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다. 틈날 때마다 툇마루를 훔치거나 마당을 쓸거나 텃밭을 돌보셨다. 뜰이 제법 넓은 집이었는데 엄마는 텃밭을 일궈 이런저런 채소들을 가꾸셨다. 오이, 가지, 토마토, 부추, 상추, 고추 등등. 엄마의 세심한 손끝에서 자란 채소들로 채워진 담백한 식단은 엄마의 자부심이었다. 반질반질 닦인 마루와 비질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마당과 잡초가 자랄 틈 없이 야무지게 가꿔진 텃밭을 갖춘 집. 어린 한 때 나를 키운 집이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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