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못한 출장비
7kg짜리 가방을 메고 버스를 갈아타며 1시간을 걸려 도착한 곳은 아주 오래된 아파트 상가였다. 애초의 짐작이 맞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저 정도로 오래된 아파트 천장이 석고보드로 마감되었을 리는 없다. 사전에 더 확실하게 확인했어야 했다. 아예 확인 과정을 생략한 건 아니었다. 요청서에 올라온 사진은 흐릿했고, 한 장은 콘크리트처럼 보였지만 다른 한 장에는 매입등처럼 보이는 것이 붙어 있었다. 물어봤다. 저게 조명이 맞냐고. 맞다고 했다. 그렇다면 석고보드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조금만 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나는 그걸 흐렸다. 이유가 없지는 않다.
“사진이 흐려서 잘 안 보이는데, 다시 찍어주실 수 있으세요?”
“등 내부의 길이와 폭을 재어주셔야 그에 맞는 모듈을 찾을 수 있어요.”
“등이 천장에서 좀 튀어나와 있나요, 아니면 쏙 들어가 있나요?”
나는 이런 질문조차 고객에게 귀찮은 일을 ‘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내가 조금 이상한 건 맞다. 하지만 그 감각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기와 조명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에게 뭔가를 ‘알아오도록’ 요청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 과정을 설명하는 일 자체가 또 다른 노동이다. 채팅과 통화로 이루어지는 소통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상담 노동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만큼 에너지가 소모된다. 물론 현장에 가서 보면 대부분은 간단히 해결된다. 하지만 그 ‘간단함’에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이 든다. 이동이 있고, 체력이 들고, 하루의 흐름이 소비된다. 그래서 비용이 발생한다. 아니, 발생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현장 확인만을 위한 출장비를 받아본 적이 없다.
받아도 되는 걸까.
너무 당연한 일인데도 어딘가 과한 요구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시공 비용이 일정 수준 이상이면 서비스로 제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공 가능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경우나, 작업 금액이 적은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마다 나는 애매한 자리에 서게 된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현장에 들어가자마자 마주한 천장은 울퉁불퉁한 콘크리트였다. 매입등으로 보였던 것은 조명이 달려 있었던 목재였다. 전기선만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든 조명을 달 수 있었겠지만, 삐죽 튀어나온 두 가닥의 전선은 이미 죽어 있었다. 집을 지을 때 콘크리트 속에 매입된 전선들은 오랜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분전함에서 나온 전선들은 외부 배선으로 따로 이어져 있었다.
욕실은 목재 천장이라 시공이 가능했지만, 콘크리트 천장 타공은 이미 오래전에 내 작업 리스트에서 지워버린 일이었다. 벽을 타공 하는 것조차 힘이 드는데, 천장을 뚫는 작업은 사다리 위에서 균형을 잃을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결국 내가 작업할 수 있는 것은 등 세 개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고객은 한 사람에게 모든 작업을 맡기고 싶어 했다. 당연하다. 그래야 비용이 줄어드니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출장비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사전 합의를 하지 않은 건 내 책임이기 때문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사라지는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허탈하게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이런 경험을 계속 쌓아갈 수는 없다. 나는 내 노동의 경계를 스스로 흐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루에 몇십만 원의 매출이 있었지만 결국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던 의류 사업 때처럼, 들어오고 나가는 것의 균형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전기 노동은 그때와 다르다. 입출이 눈에 보인다. 돈의 흐름이 아니라 내 몸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명한데도 내가 일부러 흐린 눈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결국 지치는 건 나다. 그래서 나는 이걸 분명하게 정의해 두기로 했다. 경계를 긋고, 그 경계 위에 당당히 서기로.
생각은 정리되었다. 이제 남은 건 운용 방식이다. 혼자 일하면 자유를 얻지만, 그 대가로 판단의 고독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확신이 흔들릴 때마다 내 몸의 감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건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