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계로 미끄러지는 몸
나는 영화학 박사다. 독일에서 공부했고 언어와 이미지, 문화와 이데올로기에 대해 연구했다. 내 전공은 영화 속 ‘몸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몸이 되었다. 천장에 매달린 채 전선 피복을 벗기고, 커넥터를 물리고, 이마에 올린 헤드랜턴의 열기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침묵한 채 조명을 설치한다.
과거 나는 몸을 분석했고, 지금은 그 몸으로 살아간다. 이전의 나는 몸의 ‘재현’을 연구하는 자였고, 지금의 나는 말해지지 않는 몸, 그 자체로 존재하는 몸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은 “나는 내 몸을 소유하고 있다”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점점 “나는 나의 몸이다”라는 표현에 부합해가고 있다. 물론 이 개념의 차이는 뇌과학의 발달이 데카르트와 결별하면서 내놓은 몸에 대한 패러다임 체인지의 일종이긴 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나는 나의 몸’이라는 표현은 사고의 부재를 암시하기도 한다. 그저 본능이라는 이름을 가진 몸의 언어에 충실한 존재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중성선과 활선을 구분하고 결선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때를 빼면 내가 하는 일에서는 몸이 항상 주도적인 도구이다. 앞서의 그 판단조차도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내가 생산을 주도하는 주체가 되어 내 몸을 움직인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내 자아와 내 몸과의 일체성이 이토록 크고 생생하게 다가왔던 적은 없었다.
이전에도 나는 물론 몸으로 일을 해왔다. 허리를 한껏 꺾어대며 바디프로필을 찍는 사진작가일 때도 그랬다. 바지 한 장 한 장에 스팀을 쏘고 실밥을 제거하고 접어서 행택을 달고 포장을 한 뒤 사은품을 넣어서 발송하는 일을 할 때도 몸은 자동화된 공장처럼 움직이곤 했다. 하지만 다르다. 그때의 내 몸은 나의 수단이고 표현의 도구이며 나의 것이었다. 사진작가로서의 나는 창조하고 응시하는 몸을 갖고 있었으며 피사체를 재현하는 시선의 주체였다. 나의 몸은 보고 선택하고 포착하는 능동적 주체의 몸이었다. 사회적으로도 작가라는 상징적 지위를 부여받은 몸, 즉 상징계 안에서 말해질 수 있는 몸이었다. 메를로 퐁티를 거론하자면 내 몸은 지각하는 몸이었다. 의류업을 하는 나의 몸 역시 유사한 맥락 위에 놓여 있었다. 나의 몸은 한편으론 옷을 디자인하는 창조자였고 브랜드라는 기호를 생산하는 주체였기에 사회적 의미를 만드는 위치에 있었다. 푸코적 의미에 부합하는 권력/기술의 주체이며 기능하는 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플랫폼이 나의 노동에 개입하고 통제한다. 호출하고 규정한다. 그들은 나를 말하도록 두지 않는다. 내 목소리는 조건문에만 반응한다:
“작업 가능하신가요?”
“언제 시간 되시나요?”
그 너머는 없다. 나는 발화할 수 없는 존재이며 다만 응답하는 존재로 축소된다. 내가 발화를 하면 그것은 분쟁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그건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이렇게는 작업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나의 발화는 플랫폼에서의 내 존재기반을 위협할 수도 있다. 플랫폼의 고객은 요청자이며 플랫폼은 그들의 대변자가 된다. 그들은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플랫폼은 각종 유인책을 써가며 그들을 묶어두어야 한다. 그 요청에 답하는 노동자들은 어차피 플랫폼에 의존하는 존재인지라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작은 구멍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불공정하게도 노동자들이 지불하는 수수료 체계가 플랫폼의 최대 수익모델임에도 말이다.
라캉은 ‘실재계(the Real)’란 말로는 포착될 수 없는 것, 즉 상징계(언어) 밖에 있는 잉여라고 했다.
“실재계는 절대적으로 기호화될 수 없는 것이다.”
— 자크 라캉, 세미나 XI
그 실재가 지금, 내 몸으로 틈입한다. 오전부터 사다리에 올라 천장을 향해 목을 꺾고 손을 한껏 올려 무게가 적지 않은 전동 드라이버를 들이댄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상징계 속의 주체가 아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는 이 사회의 언어 바깥에서 단지 작동하는 하나의 부품이 된다. 그 부품은 고통을 느끼지만 말하지 못하고, 무게를 감당하지만 발화하지 못한다. 내 몸은 언어를 통해 포장되지 못하는 종류의 무색무취한 덩어리로서 존재한다. 석고 천장에 브라켓을 박거나 스위치를 뜯어 전선을 빼내고 있는 몸은 어떤 식으로 상징계에 편입될 수 있을까. 성별과 나이라는 상징화의 표식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것이 상징계와 실재계의 경계에 놓인,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의 심연에 위치한 존재로서의 몸이다. 실재계로 미끄러지는 몸은 스스로의 가치에 대한 실존적 물음조차 허망함으로 인지한다. 물론 가끔은 이런 말을 듣기도 한다.
“좋은 기술을 가지셨네요. 기술이 최고예요.”
기술이 몸에 붙어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재산이라는 관념은 직업을 내려놓아야 하는 상대적 나이가 낮아지는 고연령 사회의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보편화되는 ‘상식’ 중 하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월 천을 번다는 도배사의 이야기는 얼마큼의 진실을 담고 있을까. 나는 이 사회에서 몸을 써서 하는 일이 몸을 쓰는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고 믿지 않는다. 그 기술이라는 것이 국가고시 정도의 난이도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혹 모를까, 그렇지 않은 한 몸을 쓰는 일은 여전히 ‘노가다’라고 칭해지는 시대적 맥락을 유지하고 그만큼의 사회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곳의 틈새에 화려한 외양을 갖춘 플랫폼이 스며들어 자리 잡았다. 플랫폼은 생김새와는 달리 자본주의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다. 이곳에서는 소속이 없다. 계약도 고용도 보호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평가와 삭제의 가능성뿐이다. 고객은 나를 골라내고 플랫폼은 나를 호출한다. 나는 “교체 가능한 기능”으로 살아간다. 핑크 플로이드가 노래했던 “Another Brick in the Wall” 로서. 나의 실존을 상징계의 질서 속에서 증명할 수 없는 실재로서의 몸. 언어로 말해지지 않고, 담론으로 보호받지 않고, 오직 감각과 작동으로 존재하는 몸. 노동자이지만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지는 못한 몸.
나는 어느 순간 모든 관계를 끊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알던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가 어떤 형태로든 지속적으로 내 주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일이 버거웠다. 철저하게 혼자이고 싶었다. 카톡 친구목록도 지우고 거의 모든 이들을 차단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상징계에 안정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견딜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몸으로서의 존재감만을 지닌 듯한 나와는 달리 자신의 정체성을 언어라는 수단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서사화할 수 있는 그들에게서 말이다. 하지만 그건 자괴감이나 부끄러움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나는 내 존재의 결핍 자체를 해소할 방안을 찾지 못해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삶을 실재화시키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상징계는 나를 밀어내는 곳이었기에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내 정체성은 플랫폼의 호출 시스템 안에서 생성되고 내 자아는 반복되는 수락과 거절 사이에서 해체된다. 플랫폼은 나를 담론으로도 법으로도 보호하지 않는다. 나는 상징계에서 이탈한 주체이자 말해지지 않는 몸이지만 계속 작동해야 하는 실재로서의 몸이다. 배제되는 조건 하에서만 공동체 안에 포함되는, 아감벤을 빌리자면 자본주의적인 ‘호모 사케르’가 플랫폼 노동자의 정체성이 아닐까.
나는 영화학을 전공하며 몸은 언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의 나는 묻는다.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가 쓰는 이 글이, 그 말해지지 않는 몸의 발화이기를 바란다. 말하지 못했던 몸. 선택당해야 했던 몸. 교체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몸이 이제 스스로 말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