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 실존과 시대정서가 만나는 자리

성과주의 안에서 실재계를 살아가는 몸

by 하린

오전 5시. 알람은 없지만 눈이 떠진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나의 수면 사이클은 완전히 바뀌었다. 폭염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움직이다 집에 와 씻고 누우면 의도와는 달리 불을 환하게 켠 상태에서 잠으로 직행하곤 한다. 숙면을 취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새벽에 유령처럼 깨어난다. 그리고 몽유병 환자처럼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방황하다 다시 잠을 청한다. 몇 시간 뒤에는 날이 밝아오고 내 감각도 깨어난다. 이제는 적응될 만도 하건만 오랜 습관으로 만들어진 자아상의 일부를 떠나보내는 일은 역시나 쉽지가 않다. 내가 저녁 8시에 잠이 들다니. 그리고 아침 7시에 강아지와 산책을 나가다니. 장점은 있다. 이른 시간에 작업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밤 10시에 전등을 달아달라고 나를 부를 사람은 없으니 그 시간대는 내 삶에서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니 일하는 시간도 길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일하는 시간이 길어야 한다. 몸으로 일하는 것이 전부인 삶은 그래야 연명할 수가 있다. 가능한 한 많은 일을 ‘따내야’ 하루를 성공적으로 보낼 수 있다. 지금은 그게 나의 존재를 인증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성과주의는 나만의, 혹은 플랫폼 노동자만의 계명이 아니다. 한국사회가 성과주의와 그것으로부터 파생한 공정성이라는 담론으로 뒤덮인 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사회적인 쟁점이자 문제점이자 숙제로 남아 있다. 성과주의란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성과에 따라 가치를 부여받고 또한 그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어찌 보면 문명이 생겨난 이후로 줄곧 존재해 왔던 가치체계이지만 다른 사회적 가치와의 균형이 심각하게 깨어져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성과주의는 비극적이며 비인간적이다. 성과주의가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무렵 공정성이라는 주제가 마치 대안의 일종인 것처럼 등장했다. 모두에게 성과를 낼 기회는 공정하게 보장되어 있는가? 하지만 의제는 뒤틀려버렸고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공정성은 다시 성과주의로 환원되었다. 챗바퀴는 더욱 치열하게 돌기 시작했다. 애초에 공정성을 측정 가능한 절대적 잣대로 산정한 것이 패착이었다. 출발점은 어차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회는 불평등하며 현실은 울퉁불퉁하다. 차등 적용이 답이어야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불공정이자 차별 내지는 역차별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성과를 내지 못한 탓을 그쪽으로 돌리며 분노했다. 사회적인 해결책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개인적인 답을 찾았다. 이제부터는 각자도생이다. 책임 역시 각자가 진다. 그게 공정하다. 성과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나는 성과주의 사회에서 실패한 인간이다. 사업은 망했고 빚은 쌓여있다. 성과가 없는 인간은 이 사회 안에서 침묵한다. 성과주의는 실재계의 문턱에서 자신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실패를 마주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끊임없이 실패하지 않기 위해 움직이는 자아가 된다. 움직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성과 없는 하루는 무가치하다. 고요함은 실패이고 멈춤은 죄책감이 된다.


플랫폼 노동자는 성과주의의 가장 말단이자 선두에 위치한다. 플랫폼 노동자의 성과란 시시푸스가 밀어 올리는 바위와도 같다. 대신 자기 책임의 비율은 100%에 가깝다. 이 불균형 때문에 플랫폼 노동자에게는 성과가 존재 그 자체다. 시쳇말로 몰빵을 해야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 속에서 모든 짐을 혼자 등에 지고 같은 길을 반복해서 오간다. 15만 원을 번 날은 날아갈 듯한 존재감에 한껏 들뜬다. 일을 하나도 구하지 못한 날은 집안에서 희미해지는 자아를 부여잡고 불안에 휩싸여 이불을 뒤집어쓴다. 존재는 더 이상 실존적인 물음이 아니다. 존재는 통계적 질문이 되었다. 성과란 숫자고 평가고 기록이다. 고용된 횟수, 리뷰와 별점, 하루에 잡힌 일과 그 대가의 양. 그게 플랫폼에 기록되는 나의 성과이다. 나는 그 성과를 내 스펙 삼아 플랫폼에 들이민다. 고객에게 가는 길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또 다른 성과를 쌓아 내 몸을 부풀리기 위해서. 물론 현실적으로 보건대 내 몸이 부풀려질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날 벌어 그날을 사는 삶을 유지라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나의 성과다. 말하자면 살기 위해 살아간다. 나는 내 몸이라는 말과 너무도 유사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성과의 언어’ 안에 내 몸은 들어가지 않는다. 오늘은 팔을 높이 들고 얼마나 버텼는지, 손가락의 인대 염증은 병원에 가봐야 될 정도인지, 고객과의 마찰이 얼마나 정신을 갉아먹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성과주의는 상징계의 언어다. 성과는 말로 표현될 수 있고 수치로 증명된다. 그러나 몸은 언제나 그 언어 밖에 있다. 몸으로만 성과를 증명할 수 있음에도 몸은 성과를 나타내는 수치에서 배제된다. 여기서 나는 다시 라캉의 실재계를 떠올린다.


“실재계는 말해질 수 없는 잉여이며 모든 상징화에서 밀려나 있는 잔여다.”

— 자크 라캉, 세미나 XI


나는 그 잔여를 자산으로 삼아 삶을 유지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삶은 상징계로 넘나 든다. 민생지원금으로 과일가게에서 샤인머스켓과 와촌 자두를 가득 담아 오기도 하고, 일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아 유튜브에 올리기도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버스에 오르고 내린다. 그제야 내 몸은 고객이 되고 피사체가 되고 승객이 되어 상징계의 그물망에 걸린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행위인지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재계가 내 몸을 날것으로 만들고 그 어떤 라벨도 허용하지 않으며 많은 순간 그 자체로만 존재하도록 허용함에도 여전히 상징계에 몸담고 있는 나의 일부는 내가 삶을 버티는 동력이 되어준다. 성과 역시 마찬가지다. 몸이 배제된 나의 성과는 나의 몸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전제조건이다. 삶은 이토록 역설적이며 부조리하다.


어찌 되었거나 플랫폼은 내 실존의 좌표고 성과주의는 생존의 조건이며 실재화된 내 몸이 이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한다. 나는 플랫폼 위에서 성과주의라는 시대정신을 매일 내 몸으로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과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성과를 위해서는 선택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나는 항상 누군가에게 선택당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매번을. 매일같이. 누군가 바디프로필 촬영을 예약함으로써 나를 선택하거나 나의 바지를 구매함으로써 나를 선택하는 일과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모두 다르다. 포트폴리오와 상세페이지와 이런저런 이벤트 및 광고를 통해 이미 나는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명을 교체해 달라는 요청에 견적을 보낸 나를 그 누군가가 선택해서 작업일정을 잡기 전까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청을 읽는 나도 견적을 보내는 나도 지금 여기 살아있지만 어디에서도 어떤 식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을 받은 뒤에도 요청자는 나를 ‘모른다’. 나는 요청자를 ‘거실의 등 3개 중 하나가 들어오지 않아서 교체를 원하는’ 구체적인 존재로 인지하고 있지만 요청자에게 나는 그저 그 등을 ‘교체해 줄 사람’이라는 일반성을 담지할 뿐이다. 요청자는 기호로 자리잡지만 나는 기호가 되기 전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멈춰 있다. 집을 방문해서 벨을 누르고 인사를 나눈 뒤 가방을 열어 공구를 꺼내드는 순간부터 나는 요청자에게 구체성으로 다가간다. ‘저 등을 교체해 줄 사람’으로. 하지만 거기까지다. 나는 여전히 상징계의 결핍이 만들어낸 침묵 속에 딱히 뭐라 내세울 수 없는 몸을 움직여 작업을 이어간다. 나는 엘지에서 파견된 에어컨 설치기사도 아니고 예스코에서 나온 가스검침원도 아니다. 작업이 끝나면 바닥에 널어놓은 것들을 서둘러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담은 뒤 감사하다는 말을 교환하며 신발을 구겨신은 채 현관문을 열어 밖으로 나온다. 작업을 하는 내가 아닌 나는 그 집에 머물러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신발을 고쳐 신고 땀을 닦으며 핸드폰을 열어보면 4만 원이 입금되어 있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성과를 얻고 안심한다. Body 만을 가진 Nobody 로서.


플랫폼은 하나의 시대적 형상이다. 성과주의라는 시대적 요구가 나의 실존과 가장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공간. 나 홀로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 정서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 그리고 공정성의 허상이 집약되어 있는 곳. 견적을 보낼 때마다 플랫폼에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공정성’이 ‘공정거래’를 당당하게 위반하고 있는 이 장소를 나는 지금도 떠나지 못하고 선택받기 위해 요청서의 알림에 모든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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