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 - 시민은 상징계로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실재계에 남겨진 몸

by 하린

요즘 한국 정치는 다르다. ‘국민주권시대’의 담론은 실용주의다. 이념보다는 효과를, 말보다는 결과를, 진영보다는 ‘작동하는 것’에 집중한다. 정치는 점점 행정이 되고 행정은 다시 시민의 일상이 된다.

그 일상은 국민청원이나 정책 제안 플랫폼, SNS 피드백,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전환이 담겨 있다. 정치는 다시 시민의 언어를 듣고자 하고 시민은 자신의 의사를 말할 수 있다고 느낀다. 아니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박근혜 탄핵으로 시위를 당겼던 정치적 효능감의 화살은 이제 구체적인 과녁에 안착했다. 바디우나 지젝 등이 주장했던 직접민주주의적 정치는 그들의 이념적 지향처럼 공산주의를 애써 되살려내는 대신 실용주의라는 온화한 매개체를 찾았다. 우리는 머지않아 또 하나의 K -라벨을 완성할 것만 같은 낯선 광경을 수시로 목도하고 있다.


나는 이 변화를 긍정한다. 직접민주주의는 단지 제도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문화다. 그 문화는 시민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도록 만든다. 시민은 더 이상 위임받은 자에 의해 대리되는 존재가 아니다. 이제 시민은 스스로 말하고, 요구하고, 감시하고, 결정하려 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정치는 말하고 듣는 존재들의 공동 세계다. 침묵은 폭력이다. 발화는 존재의 증명이다.”

— The Human Condition, 1958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발화의 회복, 즉 상징계로의 귀환을 목격하고 있다. 적어도 지난 3년간 뭐라 형언하기 힘든 현상들 속에서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말문이 막혀버렸던 경험은 실재계의 침입이었다. 형언하기 힘들다는 말은 기호화되지 못한다는 뜻이며 상징화에 실패했다는 의미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들은 헛웃음인지 쓴웃음인지 분노인지 좌절인지 모를 감정을 자아내곤 했다. 이건 대체 뭐지?라는 의문은 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다 그대로 미끄러지며 실재계로 내려가곤 했다. 그게 사회 구성원 다수가 겪었던 고통의 실체였다. 나 또한 그랬다.


이제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해석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항상 어떤 식의 답을 찾는다. 상징계의 질서는 다시 회복되며 제 기능을 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현상에 찬물을 조금만 끼얹어보기로 하자. 사실 현재 한국사회의 실용주의는 성과주의의 파생물과도 같은 면을 지니고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공무원. 개선해내지 못한다면 직을 걸라는 대통령의 주문과 그에 대한 장관의 거침없는 화답. 모든 책임을 지는 위임받은 자들. 실용주의 정치의 키워드는 성과다. 행정도 평가받고 정책도 리뷰당하며 효율과 효능으로 정당성을 획득한다. 지금의 정부는 바로 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나는 이 문화가 전 사회로 전염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린아이들에게 대통령도 이가 흔들리도록 열심히 일하는데 네가 뭐라고 공부를 게을리하냐며 성화를 내는 부모들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란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가차 없이 실패라고 지적하는 상사들이 당연시되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정체성을 쓸모로 재단하는 개개인들이 늘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 모든 상상이 기우이길 바란다. 성과에 기반을 두되 그 성과를 복지와 기회와 재도전으로 환원하는 정치는 분명 필요하다. 가치중립적 도구주의와 유용한 것을 진리로 보는 실용주의의 원형을 구체성이 아닌 말 그대로의 원형으로 삼고 현실과의 조화를 이루어나가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변화를 긍정한다.


그러나 나는 이 변화에서 배제된 채 남겨진 몸도 자주 본다. 그리고 그 몸 중 하나는 나다. 직접민주주의는 말하는 정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말하지 못한다. 나는 이 사회에 요청당하는 존재일 뿐 요구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이 실존은 라캉의 관점에서 분명하다.


“실재계는 상징계의 실패로 인해 틈입한다. 그것은 항상 남는 것, 불가능한 것, 말로 구조화되지 않는 것의 잔여다.”

— 자크 라캉, 세미나 XI


새 정부가 상징계를 복원하려는 시도는 유의미하다. 하지만 그 언어와 절차, 제도의 바깥에는

여전히 말해지지 않는 실재가 남는다. 그 실재는 나 같은 노동자의 몸이다. 나는 평가받지만 의견을 말하진 못한다. 나는 호출되지만 요구하진 못한다. 나는 선택받지만 선택하진 못한다. 정치가 다시 시민을 상징계로 끌어들이는 그 순간에도 플랫폼 노동자는 여전히 실재계에 존재한다. 그는 참여하는 몸이 아니라 작동하는 몸이다. 그는 주체가 아니라 경제적 기능으로 호출되는 잔여다. 이 실재를 말하게 하지 않는 한 정치는 여전히 일부만을 구조화하는 장치에 머문다. 정치는 더 나아가야 한다. 말해지지 않는 몸을 구조 속으로 포섭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은 민주주의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직접적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해도 그것은 일부만의 상징계, 일부만의 발화권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누가 아직 말하지 못하고 있는가? 정치는 그 ‘남겨진 자’를 향해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실용주의 정치가 넘어야 할 마지막 문턱이다.


물론 실용주의는 단지 새 정부의 기조가 아니다. 실용주의는 시대정신이다. 그래서 나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나는 오늘 무거운 유리 커버가 달린 형광등 여덟 개를 철거하고 총열개의 새 LED 조명을 설치했다. 이동시간까지 합친 작업시간은 모두 다섯 시간. 매출은 160,000원이며 그중 플랫폼에 낸 수수료가 37,000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건의 일을 따내기 위해 날려 보낸 견적서들의 총액이 대략 그 정도다. 그리고 부자재 값이 10,000원가량에 교통비가 4,500원쯤 되니 순이익은 108,500원이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오늘은 어떤 하루였을까. 시간당 21,700원을 받았으니 법정 최저임금의 두 배를 번 셈이다. 실용주의적 계산으론 “잘한 하루”다. 결과는 괜찮다, 그러니 괜찮은 하루다. 나 역시 그렇게 말한다. 오늘은 만족스럽다고.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나는 일을 할 때 좀처럼 쉬지 않는다. 오늘도 그랬다. 시간이 갈수록 몸에서는 땀냄새가 피어났고 손아귀 힘은 점점 빠졌으며 집으로 오는 길에는 오후 2시였음에도 꼬박꼬박 졸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두를 단지 108,500원으로 요약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일했는지. 내 목에 남은 통증은 무엇을 말하는지. 두꺼운 유리 커버와 무거운 형광등 본체를 해체할 때의 두려움은 어떻게 견뎠는지. 오늘의 나는 성공했다. 결과는 수치로 증명된다. 하지만 이 계산은 무언가를 지운다. 천장을 향해 뻗은 팔의 안간힘, 일이 길어질수록 고객들이 불편해하는 시간의 무게, 힘이 사그라들 때 삼켜지는 조용한 비명. 내가 철거한 형광등은 아틀라스가 짊어진 하늘처럼 느껴졌다. 두꺼운 유리는 한껏 힘을 준 손가락과 꺾어진 손목에 얹혀 있었고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절대 떨어뜨리면 안 돼.” 그 말은 한 인간의 자기 방어적 주문이었다. 실용주의는 이런 말을 담아내지 못한다. “너는 결국 해냈잖아.” 하지만 내 몸이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몸에는 노동의 대가가 아닌, 정서와 감각이 새겨진다. 나는 그것들을 애써 외면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 몸의 상태가 아니라 그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치라고 말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성과로? 효율로?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점점 더 도구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결과로만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인간. 그 끝에 남는 것은 숫자로 환산된 생존의 기억뿐이다. 그러나 나는 바란다. 내가 감당한 무게를, 내가 이겨낸 하루를, 어떤 이야기로 남기고 싶다. 어떤 존재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그게 바로 실용주의가 잊은 몸의 철학이자 우리가 되찾아야 할 삶의 자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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