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 그래도 살아가고 있는 몸의 의미
내가 지고 있는 채권을 매입한 새출발기금으로부터 조정된 채무의 최종 변제금이 고지되었다. 채무조정 신청 시 안내를 받은 바에 의하면 조정기간은 7개월 정도가 걸릴 것이라 했고 나는 그쯤이면 어느 정도의 돈을 벌고 있을 것이라 가정을 했다. 하지만 틀렸다. 변제금은 여전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고민 아닌 고민을 했다. 답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살자고 하면 파산이 답이었고 그 외의 답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우울증 약을 처방된 양 이상으로 털어 넣으며 며칠이 지나갔다. 결정은 파산신청으로 기울었다. 아직 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죽기 싫었던 걸까. 깊게 들여다본 내 마음은 살기도 죽기도 싫은 상태였다.
파산 신청 준비를 하느라 며칠간 일을 쉬고 있다. 일을 쉬니 몸은 편하고 마음이 불편하다. 그러나 불편한 마음은 편한 몸에 침투해 두통 등의 증상을 만들어내고 편한 몸 역시 불편한 마음에 스며 잠시의 휴식을 허락한다. 이 혼돈 내지는 조화를 이루는 움직임이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몸을 유지시키는 아슬아슬한 균형일까. 무엇보다 파산 선고를 받고 신용불량자가 되어도 나는 살고 있는 걸까. 어차피 내 삶을 내가 결정할 선택권은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채무는 모두 3년간 의류 사업을 하면서 축적된 결과물이었다. 지금 나는 열심히 일한다. 한건의 일을 마치고 나면 10년쯤은 족히 늙어 보일 정도로 지치고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열이 잔뜩 오른 얼굴로 고객의 집을 나서지만, 일을 멈추고 있는 짧은 순간 그로 인해 얻은 대가는 통장 속에서 빠르게 사라진다. 이 구조 아래서는 가치를 축적할 수 없다. 몸이 버티는 시간만큼만 잠깐씩 존재할 수가 있다. 생활 자체가 불안정한데 채무까지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오게 되었을까. 내 딴에는 치열하게 살았는데 손에 쥔 것은 고사하고 몸까지 헐벗은 채 홀로 서있게 되었을까.
파산이란 단어는 이상하리만큼 차갑다. 단지 경제적 용어인데 들리는 순간 존재 전체를 정의해 버리는 힘이 있다. 파산은 “이 사회에서 당신은 더 이상 감당 가능한 주체가 아닙니다”라는 공식적인 낙인처럼 들린다. 나는 이 낙인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실패는 누구에게나 있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다. 나는 법적으로 공식적으로 경제적인 사망 선고를 받을 예정이니까. 파산은 삶의 실패가 숫자로 번역되는 일이고 그 번역이 법적으로 승인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실패한 몸은 과연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살아있는 존재로서 응당 할 수 있는 일들을 나 역시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푸코를 떠올린다. 그는 말했다. 권력은 모든 곳에 스며들지만 모든 것을 말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권력은 모든 것을 조직하고 통제하면서도 어떤 몸은 말하지 않게 만든다. 말할 수 없게 만든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지금 내 몸이 그렇다. 나는 말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물론 입을 열어 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 나의 존재를 정의하고 있는 파산이라는 실패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기 힘들다. 그건 순전히 내 잘못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표현은 이 경우에 잘 들어맞는다. 나는 단순히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신뢰, 능력, 책임감 전체를 부정하는 담론으로 낙인찍힌 몸이다. 파산 신청을 위한 수십 개의 서류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서류의 용도가 ‘파산’ 신청이라고 대답한 경우는 단 한 번이었다. 부끄러웠다. 채무조정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파산은 배제와 퇴출이라는 의미를 너무도 강하게 담고 있는 용어이다. 그 속에 스며있는 권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푸코의 권력 개념은 반드시 정치권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권력을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힘, 그리고 삶의 조건을 설계하는 장치로 보았다. 병원, 학교, 감옥, 군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금융 시스템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과거 권력은 법과 제도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없는 것”을 명시했다면, 지금의 권력은 돈과 조건을 통해 “하게 되는 것/못 하게 되는 것”을 설계한다. 정치권력이 사회를 지배하던 자리에 자본 권력이 깊숙이 들어앉았다. 은행과 금융 제도는 단순한 경제 기구가 아니다. 그들은 사람을 분류하고(신용등급), 행동을 규율하며(상환 일정), 위험을 전가한다(부실채권 매각). 이것은 법률보다 오래 작동하고 선거보다 더 개인의 삶을 깊게 좌우한다.
파산은 나의 부주의나 불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자본 권력이 설계한 규칙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내가 발생시킨 채무가 나의 책임이 아니며 전적으로 권력의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기관’들을 훌쩍 뛰어넘는 조금 더 높은 추상단계의 사고가 필요하다. 권력은 규율로 통제하고 그를 통해 사회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거대한 작동방식은 드러난 곳에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세상을 조율하거나 조종한다.
대출은 표면적으로 ‘기회’를 준다. 생활비와 사업자금, 주택 구입 자금이 없는 사람도 미래의 소득을 당겨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장기적인 종속 계약이기도 하다. 이자 수익, 부가 수수료, 담보 활용, 고객 장기 확보 등, 이 모든 구조는 은행과 투자자, 즉 자본 보유층에게 이익이 집중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은행은 개별 채무자에게서만 이익을 얻지 않는다. 대출이 많아질수록 시장 점유율과 영향력이 커지고, 금융권 내 발언권이 강화된다. 규제 논의에서 유리한 입장을 점하고 산업 자금의 흐름을 좌우하며 결국 경제의 우선순위를 결정짓는다. 대출은 자본 권력이 사회를 설계하는 가장 정교한 도구다.
이 구조 속에서 나는 채무자가 되었고 채권은 부실이 되었으며 새출발기금에 매각되었다. 은행은 손실을 장부에 기록했지만 유동성을 확보했고 위험은 보증과 제3기관으로 분산됐다. 채무자인 나는 파산 절차 속에서 신용불량자로 분류되었고 사회적 외곽으로 밀려났다.
권력은 ‘정상’이라는 범주를 만들고 그 반대편에 ‘비정상’을 둔다. 정상은 비정상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파산자는 바로 그 경계에 배치된다. 비정상이라는 이름 아래, 권력은 나를 사회의 ‘외곽’에 두고 감시하고 관리하고 규율한다. 나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이유는 비정상의 존재가 정상의 가치를 끊임없이 강화하기 때문이다. ‘저렇게 되지 않으려면 규칙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두려움이 사람들을 스스로 통제하게 만든다.
푸코는 말한다. 말하지 못하는 몸이야말로 권력을 드러낸다고. 침묵은 권력의 부재가 아니라, 그 작동 방식을 폭로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내가 발언할 수 없는 이유를 더듬어가다 보면, 금융/법/정치라는 미시 권력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가 드러난다.
나의 침묵은 권력의 지도다. 나는 나의 불능의 경계선으로 이 사회의 권력이 사람을 분류하고 관리하는 방식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몸은 사회의 시선을 휘게 만든다. 사회는 ‘성공’, ‘생산성’, ‘정상성’이라는 세가지 축 위에서 시선을 조직한다. 그 중심부에는 ‘경제활동 참여자’만이 설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원의 바깥에 있다. 기록에는 있지만 시선 속에는 없는 사람. 나를 보려면 시선을 비틀어야 한다. 그 순간 사회가 ‘정상’이라 불렀던 중심은 불안정해지고, 시선의 축은 기울어진다. 보이지 않는 나의 위치가, 사회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바꾼다.
나는 말하지 못하는 몸이고 지워질 수 있는 존재이며 실패한 몸이다. 하지만 그 실패는 전적으로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권력이 설계한 규칙 속에서 구조화된 사건의 일종이기도 하다. 그것은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균열이며 사회의 시선을 어긋나게 하는 힘이다. 말하지 않는 이 몸은 침묵 속에서 여전히 말하고 있으며 수시로 죽음을 생각하지만 아직 존재하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때로는 이 사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된다. 삶에 대한 열정이 클수록 죽음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열정적으로 살아봤기 때문에 미련이 남아있지 않으니까. 이 삶이 기록되지 않아도, 성과로 환원되지 않아도, 위로되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될 수는 없는가?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설득 중이다. 그렇게 믿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