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키로는 닿지 않는 세상에서
나는 조명을 다룬다. 천장에 손을 뻗고, 석고 천장에 구멍을 뚫어 브라켓을 달고, 무거운 전동 드라이버를 공구 주머니 속에 넣은 채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균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형광등에 달린 유리 커버를 내릴 때면 중심이 순간적으로 무너질 듯 흔들린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긴장이 퍼지고, 내 몸은 공간에 맞춰 스스로를 재조정한다. 사람들은 내 직업을 두고 ‘전기 기술직’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신체적인 기술이며 몸을 갈아 넣는 노동이 그 행위의 본질이다.
벨을 누르고 현관문을 열어준 사람이 나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경우는 꽤 잦다. 플랫폼에 올라가 있는 프로필을 보지 않고 나를 고용한 사람들의 경우 ‘당연히’ 남자가 조명을 교체하러 올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단하다’는 말을 건네고 어떤 사람들은 불신의 눈으로 내 작업을 바라보기도 한다. 남자가 해야 어울리는 일이니까. 그 불신은 나를 더 조심스럽게, 더 빠르게 움직이도록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그로 인한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부식된 전선과 조명의 조도에 대해 설명을 해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속내가 드러나 보일 때와 같이.
나는 여자다. 그리고 몸을 써서 일한다. 남자들에 비하면 키도 크지 않고 근력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대부분의 작업 환경은 ‘표준 신체’, 즉 남성 중심의 구조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남성의 평균 키, 평균 근력, 손 크기, 팔 길이. 그 무언의 기준들로 인해 내가 감당해야 할 동작은 더 많고, 힘은 더 들어간다. 누군가에겐 팔 하나만 뻗으면 닿는 거리를 나는 사다리를 옮기고 다시 올라서야 겨우 닿는다. 절연테이프 하나를 끊어내는 일에도 손에 더 많은 긴장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몸의 방식으로 세계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체의 정치학이 아닐까.
푸코는 근대 사회를 통제하는 방식이 권력의 강압이 아닌, 몸을 훈육하고 정상화하는 미시권력이라고 보았다. ‘표준’이 된 신체는 통제의 기준이자 권력의 도구다. 그 기준에서 벗어난 몸은 자연스럽게 ‘비정상’, ‘비효율’, 혹은 ‘약자’로 간주된다. 나는 그 ‘비표준’의 몸으로 매일 작업 현장에 들어선다. 몸은 매일 그 기준에 의해 판단받는다. 더 오래 걸리면 느린 것이고, 더 많은 동작을 하면 미숙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눈치를 보곤 한다. 내 몸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나름대로 능숙하게 일을 하고 있는 편이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를로퐁티가 말하듯, 몸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세계와 부딪히며 자신만의 동작과 리듬을 발명하는 주체다. 내가 이 작은 몸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다시 팔을 뻗고, 손끝으로 전선을 만지는 일련의 행위들은 단지 노동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나만의 응답이다. 이 작업은 표준화된 산업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의 방식이면서도, 동시에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언어 없는 철학이다.
하지만 이 과정이 항상 자부심만 주는 건 아니다. 강한 몸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냉정한 경제적 질문을 동반한다. 하루가 끝날 때, 나는 스스로 묻는다. 이렇게 빨리 소모되는 에너지와 체력을 쓰면서,
이 일을 돈 받고 계속하는 게 맞는 걸까? 작업 중에 흘린 땀과 소비된 체력이, 받는 돈과 제대로 맞바뀌고 있는 걸까? 이 물음은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서 가시처럼 남는다. 사실 모든 고객이 원하는 건 한 가지다.
“저 사람이 빨리 일을 마치고 갔으면 좋겠다.”
나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두서너 배의 힘을 써야 하고 두서너 배의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피곤하고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 일을 좋아한다. 조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스위치에 있는 것인지 배선에 있는 것인지 알아내는 과정은 흥미롭다. 회녹색으로 부식된 전선을 잘라내고 새 전선으로 이어주는 작업은 죽어있는 것을 살리는 기분이라 뿌듯하다. 석고보드에 앙카를 사용해서 브라켓을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일을 하다 보면 작은 발명품의 기특한 능력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고된 노동의 틈새로 보이는 이 소중한 빛들은 나의 초라한 몸까지 밝혀주는 느낌이다.
여성을 뜻하는 독일어 표현 중 하나는 das schwache Geschlecht - ‘약한 성’이다. 오래된 말이고, 시대착오적인 개념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형태를 바꿔 수많은 노동 구조 속에 잔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약자의 몸으로 강한 일을 한다. 더 많은 동작, 더 많은 긴장, 더 많은 침묵. 그 모든 것 속에서 나의 몸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 낸다. 효율의 세계 안에서, 나는 비효율적인 몸으로 살아남는다. 표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워질 수도 있었던 몸이지만, 오히려 그 틈을 통과해 다른 존재의 방식을 실천한다.
몸은 효율의 기계가 아니다. 세계와 마주하는 나만의 방식이며, 살아 있는 사유다. 나는 이 작은 몸으로, 이 약한 힘으로, 이 느린 속도로 조명을 단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실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