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과 존재의 경계에서
나는 몸으로 먹고 산다. 천장에 손을 뻗고, 전선을 만지고, 불을 켠다. 무거운 조명을 들어 올리고, 사다리 위에서 중심을 잡는다. 내 하루는 손목과 허리, 눈과 발끝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플랫폼을 통해 일을 받는다. 플랫폼은 내 이력을 보여주고, 고객은 내 별점을 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오직 몸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내 손이 닿는 거리만큼의 세상, 내 근육이 버티는 만큼의 임무, 내 신체가 기능하는 시간만큼의 소득이 나의 전부다. 이 몸은 나의 자산이 아니라 나의 생존 수단이다.
하지만 요즘 나는 자주 묻는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짜 삶일까. 내가 지금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이 상태는 이미 절반쯤 죽은 몸의 형상이 아닐까. 생활비도 제대로 벌지 못하는 노동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고, 빚더미를 어쩌지 못해 파산을 앞두고 있으며, 그 뒤에도 사실상 별다른 희망이 보이지는 않는, 그런 삶은 어디쯤 위치하는 걸까. 삶과 죽음 사이를 잇는 스팩트럼이 있다면 죽음에 더 가까이 자리 잡고 살아가는, 방향성이 뚜렷하지 않은 희미한 삶이 아닐까.
프로이트는 인간 안에 두 개의 충동을 보았다. 하나는 생명을 지탱하려는 에로스, 다른 하나는 죽음을 향한 타나토스다. 그러나 타나토스는 단순한 파괴나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긴장에서 벗어나려는 몸의 오래된 갈망이다. 살기 위해 사는 사람에게 삶은 매일의 반복으로만 채워진다. 오늘은 어제와 닮아 있고 내일은 오늘의 연장이며 생존은 더 이상 새로운 의미를 만들지 못한다. 그 반복의 굴레 속에서 타나토스는 은밀히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을 향한 충동은 자기를 무너뜨리려는 힘이 아니라 끊임없이 강요되는 생존의 긴장을 잠시 멈추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타나토스는 파괴가 아니라 해방이다. 끝을 향한 파멸이 아니라 고통 없는 정지와 고요를 향한 충동이다. 생존만을 위해 소진되는 삶 속에서 타나토스는 역설적으로 삶을 견디게 하는 그림자 같은 동반자가 된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 너무 무거울 때 찾아오는 해방의 가능성이다.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몸으로, 같은 도구를 들고, 같은 자세로 같은 구조물과 싸운다. 그 반복은 나를 조금씩 닳게 한다. 그러니 내가 죽고 싶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무한 반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무언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사실 요즘은 자살 충동이 강한 날들이 잦다. 그럴 때면 스스로에게 묻는다. 정말 그러고 싶냐고. 아니라는 답이 6, 그렇다는 대답은 4 정도인 것 같다. 6이라는 숫자가 나의 자살을 막고 있다. 물론 그 6이 살고 싶다는 욕망인지 지금 죽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저항인지는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6이 4를 자기 쪽으로 당기고 있는 상황이 안정적인 건 아니다. 충동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충동은 나의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네 삶을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면,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내 삶은 무한히 반복되기에는 너무 비좁고, 너무 피곤하고, 너무 무의미하다. 나는 단지 살기 위해 산다. 그 이상은 없다. 단지 전선을 잇고 불을 켜고 몇만 원의 대가를 받으며 생존을 반복한다. 그건 삶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유지’에 불과하다.
메를로퐁티는 몸이 단지 세계를 지각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자체라고 보았다. 몸은 존재의 방식이다. 하지만 내 몸은 더 이상 세계를 탐색하거나 느끼지 않는다. 이 몸은 오직 기능하고 감내하고 버티기 위해 존재한다. 다른 감각들은 모두 닫혔다. 이 몸은 감각의 통로가 아니라 세계와 나를 차단하는 막막한 벽이다. 나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이 몸을 벗어나고 싶다. 지금의 이 반복을 중지하고 진짜 어떤 다른 상태로 이동하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매달려야 하고, 견뎌야 하고,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유혹처럼 다가오지만, 생존은 의무처럼 붙들고 늘어진다. 죽고 싶은 것은 삶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만 사는 삶이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내가 원한 삶은 이것이 아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단지 고정비를 감당하고, 다음 달도 연명할 수 있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전초에 놓인 대기 상태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몸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 몸은 이미 죽음을 닮았다. 플랫폼에 묶이고 수수료에 잘리고 리뷰에 흔들리는 이 몸은 존재의 증명이라기보다 존재의 절감을 향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 나는 살아 있다. 죽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언젠가 다시 ‘살기 위한 삶’이 아니라 ‘살고 싶은 삶’을 감각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