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몸, 감각되지 않는 노동

메를로퐁티의 세계는 나를 환영하지 않았다

by 하린

나는 몸을 써서 일한다. 전선을 자르고 조명을 달고 사다리를 오르며 전기와 먼지를 마주한다. 이 일은 어렵지 않지만 단순하지도 않다. 작업 현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몸으로 감당해야 할 모든 것을 계산하기 시작한다. 천장의 높이를 가늠하고 무게중심을 조절하며 다음에 쓸 공구의 위치를 떠올린다. 공구가 든 가방은 이미 무겁다. 허리에 차는 순간 몸은 한쪽으로 기울고 내려놓는 순간부터는 또 다른 노동이 시작된다.


천장 가까이에서 석고가루가 흩날리고, 그것이 눈에 들어와 시야를 흐린다. 전선을 커넥터에서 빼내는 일조차 보기와 달리 힘이 많이 들 때가 많다. 특히 키가 작은 나는 각이 잘 나오지 않아 팔을 천장 위로 최대한 들어야 한다. 그 동작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나도 몰랐다. 팔의 근육은 금세 피로해지고 자세를 고정하기 위해 온몸이 긴장된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기 시작한다. “저걸 저렇게 힘들게 하나” “왜 저렇게 오래 걸리나” 그들의 시선 속에서 이 노동은 기술이 아니라 단순한 버거움으로 환원된다. 나는 작업하고 있지만, 감각되고 있지 않다. 내 몸은 기능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메를로퐁티는 노동이라는 말을 직접 정의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유에 따르면 노동은 본래 세계와의 상호작용, 즉 응답이 있는 행위다. 내가 몸을 움직이면 세계는 저항, 질감, 변화로 반응하고 나는 그 반응에 따라 몸을 조정한다. 벽을 칠하는 붓끝의 감각, 재봉틀에 닿는 원단의 당김, 카메라 셔터에 응답하는 피사체의 표정 같은 것들이 그 증거다. 이런 상호작용 속에서 노동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의미 있는 행위로 자리 잡는다.


나는 과거 사진작가로 일할 때 피사체와 끊임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렌즈를 들이대면 상대의 표정이 바뀌고 몸짓이 반응했다. 피사체의 움직임은 나의 촬영 각도와 호흡에 영향을 주었고 그 변화는 다시 피사체에게 전해졌다. 옷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단을 만지고 디자인을 구상하고 거래처와 상의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과 감각이 오갔다. 그 시절의 노동은 명백히 상호교환적이었다. 내가 움직이면 세계가 반응했고 그 반응은 나의 다음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지금 전기 작업 현장에서 나는 다른 종류의 침묵 속에 있다. 드릴을 누르면 벽은 여전히 물리적 저항을 주지만 그 행위에 대한 사회적·상징적 반응은 없다.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오래 작업했는지, 그 시간 동안 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떤 기술과 판단을 썼는지를 보지 못한다. 완성된 ‘불이 켜진 상태’만 소비할 뿐, 그 과정은 은폐된다. 메를로퐁티가 전제한 완전한 상호성은 무너지고, 나는 세계와의 절반짜리 대화 속에서 일한다. 물리적으로는 세계와 맞닿아 있지만, 사회적 인식 속에서는 감각되지 않는 몸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고립이 나를 완전히 괴롭히지만은 않는다. 지금의 나는 파산과 여러 사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 나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시선에서 벗어나 몸과 과제에만 몰입할 수 있는 이 노동은 때로 은신처가 된다. 응답 없는 노동은 나를 세상에서 희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세상의 간섭으로부터 안전하게 숨겨준다. 상처이면서도 피난처인 이 모순된 상태 속에서 나는 더 깊이 고립에 익숙해져 간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은폐된 노동이 언제나 무관심 속에 묻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전기 작업이라도 현장에서 바로 보면 그저 먼지와 땀, 소음과 반복 동작으로만 채워진 실재계의 풍경이다. 상징화되지 않은 날것의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욕망보다는 피로와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장면을 촬영해서 유튜브 쇼츠로 만든다면? 영상 속에서 재편집된 전기 노동은 다르다. 긴 과정은 압축되고, 위험은 스릴로, 피로는 성취로 번역된다. 음악과 자막, 서사의 구성이 그 노동을 상징계의 언어로 변환시킨다. 이렇게 이미지가 되면 노동은 비루함을 벗고 ‘배울 만한 기술’이나 ‘감탄할 장면’으로 소비된다. 라캉이 말한 것처럼 욕망은 결핍을 통해 작동한다. 현장의 날것은 결핍을 만들지 않지만, 영상은 결핍을 구성한다. “나도 저걸 할 수 있을까?”라는 가능성, 즉 욕망할 틈이 거기서 생긴다. 결국 어떤 노동은 은폐된 상태에서는 무감각하게 지나가지만 가시화되고 가공될 때 욕망의 대상으로 재탄생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은 생명 유지를 위한 활동이며, 반복되고 소모되는 성격을 가진다. 행위만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세계를 남긴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일에 기술과 판단을 쏟고 공간을 분석하며 위험을 감수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일을 단순한 노동, 혹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잡역처럼 여긴다. 나는 창조하는 몸이지만 세상은 나를 생존을 위한 반복기계로 본다. 나의 일은 단순히 공구를 드는 팔과 드릴을 받치는 어깨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경험, 기술, 감각이 있으며 나는 타인의 공간을 빛으로 바꾸는 존재다. 그러나 이것이 ‘작업’이나 ‘행위’로 호명되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만 남는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종종 있다. “어떻게 그런 좋은 기술을 가지셨어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술’에 대해 대가를 치르는 일에는 인색하다. “~만 해주시면 됩니다”라고 적혀있는 요청서를 많이 접한다. “간단한 작업입니다” 도 비슷한 종류의 요청이다. “인건비가 싸게 먹히는 일”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표현들이다. 나는 그런 요청서들을 미련 없이 뒤로 넘겨버린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의 노동을 존중하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세상이다.


나는 조명을 단다. 어두운 공간을 밝히기 위해, 석고가루를 뒤집어쓰고 눈을 감고 팔을 올리고 몸을 긴장시킨다. 사람들은 빛만을 본다. 그러나 그 빛을 가능하게 한 몸의 피로와 기술, 위험과 판단은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세상에 감각되지 않는 존재로, 그러나 세계를 감각하는 몸으로 살아간다.

keyword
이전 05화약한 몸과 강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