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내 것인가

소외된 몸이 다시 나를 부르는 감각의 순간

by 하린

나는 운동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 생활스포츠지도사 자격증도 있고 동작을 만들어 설명해 주는 일은 항상 즐겁다. 하지만 나는 지금 조명을 달고 전선을 연결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파산을 준비하고 있으며 생활비와 월세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다. 몸을 써서 살아가는 일은 나를 생존시키지만 동시에 나를 소진시킨다. 매일 내 몸을 써야만 하고 쓸수록 더 나를 잃어간다. 그래서 나는 운동을 한다. 이 몸을 다시 나의 몸으로 되찾기 위해.


예전엔 예쁜 몸을 갖고 싶어서 운동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 운동은 나에게 기능의 회복이고 존재의 정렬이다. 내가 운동을 반복하는 이유는 단 하나 — 이 몸이 점점 더 내 것이 아니라는 감각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 고장 나고 균형이 무너진다. 허리는 비틀리고 어깨는 구부러지고 중심이 사라진다. 몸이 내 것이 아닐 때 나는 나를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운동을 통해 다시 자기 감각의 회로를 복구하려 한다.


메를로퐁티는 “나는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곧 몸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지금의 내 몸에 적용되지 않는다. 나는 몸을 ‘갖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세계에 내던져진 생존 장치이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기능 단위로 존재한다. 전선을 뽑고 팔을 들어 천장을 누르고 사다리를 들고 이동하는 반복 속에서 몸은 더 이상 세계와 내가 만나고 소통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건 그저 세계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구조일 뿐이다. 내가 이 몸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운동을 할 때뿐이다. 운동은 복부의 긴장을 느끼게 하고 호흡의 리듬을 의식하게 하며 관절이 어디까지 열리고 닫히는지를 체감하게 한다. 이 모든 감각은 ‘이건 나의 몸이다’라는 존재의 확인이다. 하지만 이 몸은 완전히 내 것이 아니다.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처럼, 내 몸은 언어로 포착되지 않고 나에게도 설명되지 않는 감각과 고통을 끌고 다닌다. 실재계는 상징화될 수 없는 영역이다. 내 몸은 지금 그 실재계에 반쯤 들어가 있다.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언어가 붙지 않고 지나치게 기능적이어서 의미가 붙지 않는 상태. 운동은 이 실재계에 걸쳐 있는 몸을 다시 나에게 호출하려는 시도다. 반복과 수축과 늘어남을 통해 내 몸이 다시 말을 걸게 하려는 의식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타자의 시선을 통해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건 비단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인간의 정체성은 타자의 인식과 반응을 통해 구성된다. 정신분석학에 나오는 자신이 옥수수라고 생각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나는 자주 떠올린다. 치료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인간임을 인지한 남자가 “하지만 닭이 나를 아직도 옥수수로 보면 어쩌죠?”라고 말하는 그 이야기. 나는 내가 숙련된 기술자이며 자기 몸을 훈련시키는 운동가라고 믿지만 세상이 나를 ‘파산 신청자’로, ‘단순 노동자’로만 본다면 나의 정체성은 흔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은 단지 몸을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복원하는 일이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다시 내 몸의 주체가 된다.

내 몸은 아직 내 것이 아니다. 플랫폼의 구조, 경제의 압력, 타자의 시선, 기능의 반복 속에서 이 몸은 나를 배신하고 나로부터 분리되고 나를 지우려 한다. 그러나 나는 운동을 한다. 운동은 내가 나를 감각할 수 있게 만드는 마지막 통로다. 소외된 몸이 다시 나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응답하려 한다. 다시 나로 살기 위해, 다시 이 몸을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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