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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타 Sep 27. 2022

너와 나의 밤 산책

검은 숲에 호랑이_

***
안녕, 많이 망설이다가 너에게 말을 걸어 보기로 해.


사실 말이야, 그 날 밤 너를 만나고 난 뒤에, 난 한동안 밤 산책을 나가지 않았어. 낮에는 종종 네가 생각나더라. 트램 안에서, 스튤링어 교회 공원에서, 슈퍼마켓에서 너처럼 얼굴색이 어두운 젊은 남자들을 볼 때. 네가 그랬던 것처럼 스포츠 브랜드 로고가 크게 박힌 티셔츠와 딱 붙는 청바지를 엉덩이까지 내려 입은 청년들을 볼 때마다 생각났어. 너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라곤 그뿐이고, 저 남자들도 너처럼 스쳐 지나가는 나를 훑어보며 친한 척 말을 거니깐.
그중에 혹시 네가 있었을까? 너는 낮에 뭘 하니? 네가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아.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비슷한 겉모습을 한 사람들을 보며 널 떠올리는 스스로가 짜증 나. 하지만 매번 저절로 그렇게 되어 버려.
너는 정말로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겠지? 너를 오해하고 단정하고 싶지 않아. 난 정말 이런 문제를 풀고 싶지 않다니까. 널 만난 게, 또 다른 문제 풀이로만 남은 게 화가 나. 네가 좀 빤한 답을 안 하면 안 돼? 보기를 보란 듯이 벗어나란 말이야.

그러면 문제는 무효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그날 밤에, 난 밤 산책을 나갔던 거야. 5월 밤공기는 차지도 덥지도 않고 딱 좋잖아. 밤 열 시 이십 분의 개천에서 들리는 건 물소리, 방음벽 너머 2차선 도로의 차 소리. 한창 뻗어 가는 가지와 잎 사이로 번식기 박쥐들이 날아다녔어. 물 위에 청둥오리와 왜가리들이 드문드문 떠다니지만 사람 그림자는 없었고.
나는 파란 철길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오른쪽 길을 택했어. 가로등이 없고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 길 말이야.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오래 걸을 작정이었거든. 난 밤눈이 어두워. 밤엔 시야가 흐려지고 빛은 한데 뭉개져 보인단 말이지. 꼭 어디 걸려 넘어질 것 같은 기분이야. 신경이 좀 곤두서고, 그런 신경을 에이 뭘, 하면서 다독이는 것. 밤 산책은 내게 그런 일이야.

백 걸음쯤 걷고 난 다음이었을까, 다가오는 너와 네 친구를 본 것은. 네 얼굴의 어두운 색조까지 알아보았을 때는 너와 내가, 팔을 뻗으면 서로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어. 그냥 스쳐 지나갈 예정이었지. 할로(Hallo), 라고 나는 인사했지만 사실 생략하고 싶었어. 늦은 밤이잖아. 가로등도 없잖아. 인적이 드물잖아. 그렇게 가깝게 지나지만 않았어도 인사하지 않았을 텐데. 나의 할로는 그냥 습관이었어. 여기선 그게 에티켓이잖아. 말 걸지 말고 그냥 지나가라. 나는 속으로 바랐어.

“뭐 좀 물어봐도 돼?”
깜빡 잊은 것이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우뚝 멈춘 너는 결국 내게 말을 걸어.
“으응?”
나는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네 얼굴을 바라봐.

네가 길을 묻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번에도 둘 중 하나인가 싶었지. 풀고 싶지 않은데 누군가가 내 앞에 문제지를 들이민 것 같았어. 흘끗 봐도 답이 빤한 그런 문제. 보기는 두 개야. 1번, 너는 주머니에서 그걸 꺼내 내게 사라고 한다. 2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친한 척 신상 정보를 묻는다. 하지만 거긴 그 공원이 아니었으니까 2번일 확률이 높았지.
네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는… 아마도 2초?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문제를 풀고 있었던 거야. 넌 문제를 낸 적이 없는데 무슨 엉뚱한 말이냐고? 그래, 문제를 낸 건 따지자면 네가 아니지. 지금처럼 스쳐 지나가다 돌려세워진 수많은 지난 일들과 네 어두운 얼굴색이 문제를 내는 거라고 해 두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네가 말해.
“너 어디서 왔어?”
그런데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어.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아.”
“응? 뭐라구?”
“그 질문 하지 마. 너나 나나 지금 독일에 있어.”
너는 움찔하지만 오히려 몸을 내 쪽으로 조금 더 기울이며 또 물어.
“아, 그러면… 네 이름이 뭐야?”
나는 내 진짜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아.
“하리.”
“뭐? 아미?”
“아니, 하리.”
“아, 하미.”

그러니까 답은 역시 2번이었어. 휴… 어디서 왔냐고 묻다니. 네가 2초 동안 고른다고 고른 말이 하필이면 내가 싫어하는 질문이었어. 이 질문은 너도 숱하게 들었을 텐데. 지겹지 않아? 이게 뭘 뜻하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 넌 외국인이구나. 딱 보니까 알겠다. 그런 뜻이잖아.  
너는 내가 망설이다 말해 준 이름도 알아듣지 못했어. 받침도 없고 단 두 음절뿐인 단어를, 너는 알아듣지 못했어. 그렇게 조용한 곳에서, 그렇게 쉬운 이름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네가 답답해. 재미없어.

넌 눈치 없이 날 따라오며 질문을 계속 해.
“독일에 얼마나 있었어?”
“7년”
“난 5년”
“너 저기 친구가 서 있지 않니?”
“아, 괜찮아. 쟨 그냥 기다리면 돼. 우리가 얘기할 동안.”
“…난 너랑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난 그냥 혼자 조용히 산책하고 싶어.”
“잠깐만 얘기하면 안 돼?”
“음, 지금 나는 혼자 있고 싶다고.”
나는 분명하게 말해. 지금 너와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도 너는 계속 졸라. 시장에서 물건값을 흥정하듯이, 이런 요구도 으레 하는 일이라는 듯이. 거절을 몇 번이나 겪어야 너처럼 될 수 있을까.
“아 그러면 번호 줄 수 있어? 다음에 만나자.”
“너 좀 공격적이다.”  
“아니야, 그냥 얘기만 좀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네가 원했던 건 뭐였어? 길 가는 여자 아무나에게 말을 걸고 연락처를 달라고 하는 건, 그러니까 데이트 신청인 거야? 데이트 신청은 그런 게 아닌데. 모르는 남자 둘과 인적 드문 밤의 개천에서 얘기 나누고 싶은 여자는 아마 없을걸. 이름을 알려 줄 수도, 번호를 알려 줄 수도 없지. 구글링으로 주소를 알아내거나,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낼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래.
여자와 얘기, 라는 걸 하고 싶다면 틴더에 가입해. 괜찮은 바에 가서 혹시 옆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물어. 그녀가 무거운 짐을 힘겹게 끌고 갈 때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 직장 동료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해. 그녀의 생일에 작은 선물을 줘. 환한 낮에 공원에서 날씨가 참 좋죠, 라고 말을 걸어.  
넌 왜 이런 걸 하나도 모르니. 그것도 모르고 독일에서 5년을 살아왔다고? 너의 방식은 어디에서 배운 거야? 다른 곳에서 왔다고 네 입으로 먼저 말했으니까 하는 말이야. 물론 진작 잘 배웠다 한들, 어디서 왔냐는 질문은 계속 들었겠지만.
이건 알고 있을까? 내게 거절이 당연하다 해도, 그건 무서운 일이라는 것. 어려운 일이라는 것. 얼마나, 어떻게 더 아니라고 표현해야 할까. 너무 자극하면 안 되는데. 목소리를 더 높여도 되려나. 어디가 임계점인가. 매번 아슬아슬해. 거절할 때마다.

***
나는 무거운 다리를 들어 걸음을 떼며 말해.  
“그러니까, 나는 지금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날 그냥 내버려 둬. 알았지? 잘 가.”
“...안녕.”
마지못해 안녕이라고 하는 너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져. 생글거리던 너의 두 눈과 입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어. 그리고 내 안에서는 뭔가 팍 터져. 아니 덜커덩 떨어지는 건가. 너의 좀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순간.

화났나? 저러다 폭발하면 어떡하지? 잘못 건드렸나?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고, 난 네게 등을 보이며 백 걸음을 되돌아가기 시작했어. 걸음이 자꾸 빨라졌어. 목덜미에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닿고, 심장이 쿵쾅거려. 너희는 네가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나를 따라 왔어. 나는 둔덕 윗길로 올라가 느긋하게 걸으려고 했지만, 자꾸 뒤를 돌아봤던 것 같아.


여전히 길에 사람은 여전히 없었어. 그 어둠 속에서 네가 공격해 오면 난 속수무책일 거라는 상상이 마구 시작됐어. 나는 알고 있었거든. 늦은 밤 바로 이 개천에서 살해당한 22살 마리나에 대해서. 그날 의대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하고 집에 가는 길이었대. 혹시 너도 신문에서 읽었니? 아, 그리고 내 친구 밀레센트. 트램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가는데, 겨우 10분이 걸리는데 그사이에 뒤통수를 맞았었지. 어떤 건물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어떤 남자 2명이 각목 같은 걸로 때렸나 봐. 밀리센트는 일주일 동안 학교에 못 나왔어.


개천에 물소리가 훨씬 커졌어. 도로의 소음도 사납게만 들렸고. 앙심을 품은 너는 내 뒤에 바짝 따라붙어. 나는 너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고 앞으로 너풀, 고꾸라져. 내 머릿속에서 재생된 영상. 영상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후려치는 손길부터 부딪히는 땅까지 너무 진짜 같더라. 밤 산책 괜히 나왔다고, 이쪽으로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가로등 있는 쪽으로 갔어야 했다고, 후회와 자책이 질주를 했어.

막을 수 없는 생각들은 까맣게 한데 엉키고, 내 걸음은 점점 더 빨리 진자 운동을 하는 동안, 난 거기 도착했어. 파란 다리 바로 앞, 꽃나무가 서 있는 곳. 꽃향기가 유난히 짙은 자리, 나는 늘 딱 그 자리에 숨을 크게 쉬곤 해. 그때는 다리가 멈춰지질 않더군. 뭔가 다리에 훽 채어 소스라쳤는데, 그냥 목에 걸쳤던 헤드폰 줄이 대롱거리는 거더라고.
개천의 파란 다리가 끝나면 우리 집이 바로 보여. 난 집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았어. 가로등이 줄지어 선 주택가로 들어서니까 다시 좀 숨이 쉬어졌거든. 창가에 이웃들의 실루엣과 번쩍이는 TV 화면들이 보이고, 사나운 물소리는 사라졌고.
나는 좀 더 걸어 보기로 했어. 가로등을 따라서. 바로 집으로 들어가면 너에게 지는 것 같았거든. 알지도 못하는 아무나에게, 두려움에게 이렇게 손들어 버리면, 당한 기분은 속에서 오래 끈적인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거든.

***
너를 만나고 두 계절이 지나, 나는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헤드 랜턴을 사 주었어. 29.90유로. 끈 부분은 물안경처럼 탄성 좋은 실리콘이고, 앞부분에 LED 전구가 두 개 박혀 있어. 손으로 버튼을 누르면서 빛을 조절하는 건데, USB-C 케이블로 충전할 수 있어.
이건 내 나름의 타협이야. 밤 산책을 계속하기 위한. 아, 내가 이 말을 여태 안 했구나. 나는 집 앞 그 개천에서 밤 산책하는 걸 좋아해. 밤이면 축축해지고 풀 비린내 물비린내 섞이는 그 공기.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동물들, 내 마음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물소리 같은 게 나는 좋아. 밤에 잘 못 보는 눈 때문에 풍경은 더욱 몽환적이 되고, 걸려 넘어질 것 같은 기분이나 곤두선 신경도 나쁘지 않아. 이 모든 속에 있으려면 가로등 없는 쪽으로 가야 하는 거야. 나는 밤 산책을 계속해야 해.


한 번은 헤드 랜턴을 쓰고 개천에 나갔다가 곧 빛을 꺼 버렸어. 달빛이 밝았거든. 뮤지션 오로라의 노래 〈집〉을 듣다가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어. 그 꽃나무 밑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문득 모든 게 완벽하게 아름답게 느껴지고 나의 움직임은 점점 커지고 그 자리가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졌어. 춤추는 나를, 너는 상상할 수 있니? 내게는 그때 네가 떠올랐거든. 그런데도 아름다움이 꺼지지 않았어.

그래, 말하자면 그런 날도 있었다고.
어쩌면 그날 덕분에 너에게 이렇게 말을 걸 수 있게 됐나 보다.
5월의 어느 밤, 우리가 어둠 속에서 만났던 건, 단지 하나의 사건만은 아닌 것 같아. 현실을 닮아 있는 거야. 북적이는 밝은 피부색의 사람들 속에서 서로를 잘 알지 못한 채, 알려는 노력도 못 한 채, 성급히 오해하는 현실. 중재해 줄 그 누군가도 없이 오해하기 딱 좋은 밤에만 맞닥뜨리는 것. 그러니까 너는 앞으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워. 나는 밤 산책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다 어느 날 그곳에서 다시 만나. 그때 나는 너를 믿으려 하고, 너는 내게 다르게 말 거는 거야. 우리는 이번에는 얘기해 보는 거야. 서로에게 조금 떨어져, 띄엄띄엄 묻고 답하는 긴 산책을 하는 거야.
그날 밤 우리는 더 이상 이 도시에서 이방인이 아니게 돼. 우리는 오래된 그 개천의 스쳐 가는 풍경이 되고, 수천수만 년 거기 있었던 물줄기들에게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아직 이방인이래.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2022 상반기 지원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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