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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타 Sep 21. 2022

다음에는 날 도와줄거야?

검은 숲에 호랑이_우정이 바스라진 치욕의 순간, 낯선 타인이 다가왔다

***

대학원 동기인 클레어, 마리나와 같이 호수공원에서 일광욕을 하기로 한다.

        “우리 누드 구역에서 만날래? 공공장소에서 다 벗고 다니는 거 미국에선 절대 못 하니까 여기서 한번 해볼래. 혼자는 못 해도 너희랑 같이는 할 수 있어!”

꼭 아침 방송의 경쾌한 리포터처럼 이색적인 경험을 찾아다니는 클레어가 재잘거린다.

        “오, 좋은 생각. 어차피 나는 수영복이 없어.”

오스트리아 출신이지만 대학 때부터는 독일에서 살고 있는 마리나에게는 누드 일광욕이 이미 익숙한 것 같다. 아직 해 본 적 없는 나도 흔쾌히 오케이를 외친다. 새로운 경험 앞에서 쭈뼛거리는 건 영 쿨하지 않으니까.


아직 6월 초엽인데 기온이 30도 가까이 되고 햇빛이 따가울 정도로 밝고 강하다. 전형적인 서유럽의 여름날. 이맘때가 되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일광욕을 시작한다. 분주한 공원이든 주택 옥상이든 가리지 않고 드러눕는다. 11월에서 3월까지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시달리고 나면, 여름철 일광욕은 취향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된다.

호수공원에 도착해서 누드 구역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본다. 부모 손을 잡고 물가에서 찰박거리는 아이들이나, 이태리어로 호수를 뜻하는 ‘라고(Lago)’라는 간판을 단 식당 방갈로에 손님들이나 다들 즐거워 보인다. 야외 코트에서는 풋살 경기가 한창이고, 그 옆엔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 놓고 전망대를 차지한 청소년 그룹이 있다. 근처 대학 기숙사에서 나왔는지, 연기 나는 그릴을 놓고 둘러앉은 청년들도 멀리 반대편 잔디밭에 몇 팀이나 흩어져 있다. 사람들이 다리 난간에서 호수로 다이빙을 할 때마다 물보라가 터진다. 모든 것이 생동하는, 마음을 단번에 환히 밝히는 풍경.  


나는 호수를 오른쪽에 끼고 산책로를 따라 빙 돌다가 누드 구역을 발견한다. 묘기 자전거용 언덕을 등지고 있어서 산책로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클레어와 마리나가 먼저 자리 잡고 앉아 있다.

             “오늘따라 트램이 좀 늦게 오더라.” 가방에서 작은 돗자리와 물병, 과일을 담은 락앤락 통을 꺼내며 내가 말한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도 물과 음식을 집에서 싸 온 모양이다. 일회용품을 안 쓰는 건 환경 대학원에 다니는 우리의 습관이다.

              “그럼 셋 다 모였으니까 이제 슬슬 벗어 볼까? 좀 부끄럽긴 하다.” 클레어는 먼저 말을 꺼내 놓고도 나와 마리나가 먼저 옷 벗는 것을 지켜본다.  

누드 구역에서는 우리 말고 예닐곱 명이 더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서로 선크림을 발라 주는 커플, 선글라스를 끼고 책 보는 남자, 엎드린 채 잠든 것 같은 여자 둘도 있다. ‘누드 구역’은 사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고 그냥 아는 사람들끼리 쓰는 말이다. 이곳은 1986년, 시에서 조경박람회를 유치하면서 인공 호수를 파고 그 주변에 조성한 공원인데, 규칙을 따져 놓은 표지판 같은 것이 없어도 지형이나 쓰임에 따라 자연스레 구역이 나뉘는 분위기이다.       


아무리 더운 날이어도 막상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으니 살갗에 닿는 공기가 시원하다.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히 피서. 해방감 때문인지 그냥 체온이 내려간 건지 가슴까지 후련하다. 마리나는 여기까지 왔는데 아쉽다며 한차례 평영을 하고, 클레어는 새, 거북이, 물고기도 다 같이 있는데 물속이 어떻겠어, 라고 트집을 잡으면서도 깔깔 웃으며 수다를 주도한다.

    
***
각자 수강 중인 선택 과목들을 비교하고 있을 때, 산책로 쪽에서 누군가가 나를 정면으로 쏘아본다. 캡모자를 거꾸로 쓰고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그 남자는 대여섯 명이 줄지어 지나가는 무리 속에 있는데, 호리호리하고 얼굴이 앳된 것이, 십 대 후반인 듯하다. ‘왜 쳐다보지? 하긴, 십 대들한테는 누드 일광욕이 자극적이겠지.’
햇살 아래서 한껏 너그럽고 평화로운 나는 십 대 아이들이 귀엽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날 쏘아보던 남자애는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폭발하듯 소리친다.

            

                “니하오! 니하오!”     


꼭 화난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힘껏 소리치는 그의 입에서 ‘안녕’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너무 어색하다. 뭔가 다른 단어가 나오는 게 어울릴 것 같은데. 상황이 이해 가지 않는다. ‘응? 너 나 알아?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나는 속으로만 묻는다.
혹시 다른 말 상대가 따로 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본다. 누드 구역엔 열 사람 정도가 흩어져 있고, 외침 소리에 주의가 끌려 모두 그 남자애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 ‘니하오’가 나를 향한 것임을 이제 확신한다. 나를 빼고는 이 자리의 모두가 백인이다.

전혀 인사 같지 않은, 전혀 맥락 없는 ‘니하오’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서 듣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 때 흔히 처음 내놓는 단어. 그다음에 따라오는 말은 내용이 무엇이건 대개 독일어나 영어로 하지만 첫마디는 꼭 중국어 인사말이다.


독일 생활 초창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중국인인 줄 알았나 보다.’, ‘중국어 인사말을 써 보고 싶었나 보다.’ 뒤이어 중국에서 왔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흔했는데, 좀 귀찮지만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많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그런 날들이 쌓여 가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강아지나 고양이의 목소리가 입력되면 이를 분석해서 사람의 음성 언어로 변환해 출력해 주는, 발명되었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그 기계가 내 안에 설치된 것이다. 이 기계는 ‘니하오’를 말한 사람의 표정과 몸짓,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 그다음에 나오는 말까지 복합적으로 해석해서 의미를 갖춘 한 두 문장을 출력했다. 하지만 결괏값을 매번 듣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어서 기계를 꺼 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소용없었다.

꼭 화를 내는 것 같은 이 남자애의 ‘니하오’도 어김없이 변환되어 울린다. [오늘도 인간들이 다 벗고 앉아 있네. 잠깐, 뭐야. 넌 외국인이잖아. 아시안 여자가 거기 껴서 뭐 하는 거야. 당신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 내 안에서 울리는 결괏값이 끝나고 1…2…3초.


나는 어느새 벌떡 일어나 있고, 남자애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외친다.


            “그만해! 그러는 거 아니야. 그거 인종차별적인 공격이야! 너 이리 와서 나한테 사과해. 할 수 있어? 못하지? 가. 가라고!”   
남자애는 주춤하고 발을 작게 몇 번 구르더니, 곧 등을 돌려 멀어진다.
나는 씩씩거리며 숨을 고른다. 가슴이 마구 뛴다. 아드레날린 펑펑 나오나 보다. 그 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몇몇은 이미 하던 일로 돌아가 있고, 다른 몇몇은 꼭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표정이 비어 있다. 문득 소리를 지른 게, 알몸으로 서 있다는 게 민망해져서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다.  

마리나도 클레어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입을 연다.        

            “방금 봤지? 나 이런 일 자주 당해. 이거 성희롱이고 인종차별이잖아.”
일단 입을 여니까 민망함은 사라지고 화가 치받아 올라온다. 잠깐 말을 끊고 친구들이 맞장구치기를 기다린다.

              “….”
마리나는 말없이 깔고 앉은 돗자리를 내려다본다. 내 눈을 피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방금 무슨 상황이었던 거야? 너무 순식간이라 파악을 못 했는데.”
클레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지고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다.

                “아니, 봐. 여기 여러 사람이 같이 있는데 저 남자애는 왜 꼭 나를 지목해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냐고. 방금 쟤가 막 반갑게 인사한 게 아닌 건 너희도 느꼈지? 나만 외국인이라고, 아시안이라고 생각하고 굳이 니하오라고 한 거잖아. 사실 너희 둘도 외국인인데, 꼭 이렇게….”
나는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자각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한다.
클레어는 격분하는 내 눈치를 보며 시들하게 말한다.

                “아… 그런 거야?”  

우리는 평범한 수다로 되돌아가지만 분위기는 이제 어색하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일광욕은 더 이상 나른하지도 달콤하지도 않다.

모든 것이 여전히 아름답게 생동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일부가 아니다.

튕겨 나왔다. 속으로 방금 소동을 복기하고 또 복기하느라 대화에도 잘 끼지 못한다.
‘이걸 이해를 못 한다고? 공감을 못 한다고? 잘못한 것도 없이 공격당한 건 난데, 아무도 같이 나서 주지 않은 것도 모자라서 내가 설명까지 해 줘야 한다고? 그런데도 이렇게 반응이 없어? 진짜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들은 거야? 바로 옆에 있었잖아.
클레어는 그렇다 치자. 원래 칭찬은 잘해도 대놓고 비판은 절대 못 하니까. 둔감하니까. 그래도 마리나는 이럴 줄 몰랐는데. 매주 시위에 나가잖아. 공감 능력이 최대 장점이잖아.’  


***
그날 이후, 나는 의심의 시간을 보낸다.

‘정말 너무 갑자기, 잠깐 동안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상황을 인지 못 할 수도 있어.’
‘그래도 친한 친군데, 내가 속상하다고 막 울어 버렸으면 위로해 줬을 거야.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못 본 거야.’
‘그렇게 바로 받아치지 말고 기다릴 걸 그랬나. 누군가 나서 줬을지도 몰라.’
‘그냥 성격 차이일 수도 있어. 난 어릴 때부터 누가 시비 걸면 못 참았어. 대응이 유난히 빠른 사람이라고.’
나를 의심하는 것은 나를 갉아먹는다는 것임을 알면서도 멈추기 힘들다. 뒤늦게라도 이해를 받고 싶다. 확인해야 한다. 서운함, 배신감, 실망감 같은 것들은 한번 굳은살이 되면 좀처럼 빠지지 않으니까.

오래 지나지 않아 기회가 온다. 환경 대학원 건물 2층에 있는 자치 카페. 점심시간. 도시락을 먹으러 온 우리 셋은 우연히 마주치고,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나는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리다가 말을 꺼낸다.

                “애들아… 저번에 있잖아. 우리 호수공원에서 같이 일광욕했을 때. 그때 지나가는 사람이 나한테 ‘니하오’라고 소리 질러서 내가 되게 기분 나빠했었잖아. 너희는 당황해서 가만히 있었고… 사실 그때 너희가 날 도와줬으면, 훨씬 나았을 것 같아. 음… 만약에 그때로 돌아간다면 날 도와줄 거야?”
이건 뭐, 엎드려 절 받기다.
마리나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음… 사실 그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어. 그런데 나는, 네가 그런 식으로 반응하면 도와주기 어려울 것 같아.”

                “그런 식이라니…?”
내 부탁을 거절한 적 없는 마리나, 부탁하기도 전에 도와주는 마리나가 거절을 한 것 자체가 놀라워서, 나는 다음 말은 예상하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너도 그 사람이랑 똑같이 공격적으로 대응했잖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차분하게 대화를 청한다든지… 난 ‘비폭력 대화’ 방식을 지지하는 입장이야. 게다가 갈등 상황 자체를 잘 못 견디고 누가 싸우는 걸 보기만 해도 얼어붙어.”
마리나는 정말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는지, 조리 있고 차분하고 이성적이다.
엎드렸으니 절을 받을 줄 알았던 나는 순간 멍해졌다가, 차갑게 식어 간다. 클레어는 분위기가 불편해진 것을 눈치 못 채는지 가뿐하게 끼어든다.

                “음,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잘 이해가 안 가. 비트 절임 더 먹을래? 난 이제 배부르다.”      


***
난 나를 지키려고 했던 거야. 그건 방어였어. 분노는 고통이기도 해.
난 나를 지키려고 했던 거야. 그건 방어였어. 분노는 고통이기도 해.


안에서 맴돌던 이 말이 밖으로 나갔는지 아닌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때로 중요한 순간 멍해지고, 멍해진 순간의 기억은 가려져 있다.


마리나, 클레어와는 계속 친하게 지냈다. 클레어는 대학원 졸업 후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독일인과 결혼하고서 독일에 올 때마다 만나자고 했다. 나와는 평소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 깊이 얘기할 수 있어서 좋다면서. 마리나는 나처럼 이 지역에 계속 살면서 풀뿌리 시민 단체들을 연결하는 일을 했다. 내가 관심 있을 것 같아서 보낸다는 행사 소식 중에서는 인종주의에 대한 것들도 종종 있었다.


나는 독립 저널리스트로서 취재를 다니고 글을 쓰면서 인종주의, 이주와 문화 정체성, 소수자와 연대의 문제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이 배우고 또렷한 나의 언어를 만들어 갔다. 그날 호수공원에서의 일은 결국 굳은살이 되었고, 내 몸 여기저기서 종종 만져졌다. 하지만 이해받으려는 시도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친구 사이에 마음의 거리는, 사실 점이 아니라 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들쑥날쑥한 선. 지그재그 모양의 그 선들의 어떤 지점은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어떤 지점들은 물러나 있는 것이다. 대신 부탁할 필요도, 확인할 필요도 없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
어쩐지 자꾸 잊어버리는데, 사실 그날 누드 구역에서 나를 이해한 이가 있었다. 딱 한 사람. 내가 피크닉을 끝내고 돌아가려고 돗자리를 돌돌 말고 있을 때,

그 사람은 휠체어를 탄 채 내게 다가왔다.


                “아까 봤어요. 그거 어떤 기분인지 잘 알아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저한테 말을 아주 천천히 하거든요. 한 마디씩 끊어서. 브라우헌. 지- 힐-프(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안 그러면 내가 못 알아들을 게 확실하다는 듯이. 겉모습만 보고 지적 장애인이라고 넘겨짚나 봐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엿 같죠.”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은청색 눈은 날카로웠고, 입은 시니컬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니까요. 웃기지도 않아요.”
그와 나 사이에 그 이상 설명은 필요 없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서.

                “저기, 이름이 뭐예요?”

                “다니엘이요.”

그날 그곳에서 다니엘만은 보았던 것 같다. 알몸으로 벌떡 일어서 고함친 내가 무엇을 감수했는지. 그는 그것을 보았고, 어쩌면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휠체어 바퀴를 굴려 내게 왔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때 나는 일어서지 않을 수 없어서 일어섰다.


 
곧잘 간과되는 치욕의 요소가 한 가지 더 있다. 어떤 말과 몸짓, 어떤 관행과 신념이 언제 어떻게 한 사람을 배제하고 상처 입히는지 그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스스로 지적한다는 것은 몹시 불편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려면 언제나 뭔가(두려움뿐 아니라 수치심까지)를 극복해야 한다. 어떤 일이든 저항하거나 반박하려면 자신의 상처를 먼저 언급해야 한다는 굴욕이 전제된다. (…) 또한 자신이 누구로서 공격당하는지 늘 자문해야 하고, 그런 다음 누구로서 말하는지도 맥락에 넣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자신의 상처에 대해 분명히 말하려 하는 사람, 늘 한결같은 배제의 방식에서 느끼는 비애를 더 이상 억누르지 않으려 하는 사람은 흔히 ‘분노한(분노한 흑인 여성)’ 사람으로, ‘유머 감각이 없는(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 사람으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역사로부터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유대인)으로 취급된다.
- 카롤린 엠케, 『혐오사회』 중에서
 


*이 글은 '아르코문학창작기금 2022년 상반기 발표지원' 선정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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