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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타 Oct 05. 2022

분개하거나 애도할 힘은 아껴두겠다

퀴어 일기_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레인보우 플래그가 있다면 괜찮아

2022년 8월 20일

이번에 한국에 와서 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 중 하나는 마음 맞는 퀴어 페미니스트 커뮤니티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가능한 루트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요즘 서울/한국에서 가장 활성화된 커뮤니티 중 하나가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이니까, 먼저 거기로 접근해봤다. ‘**네트워크’ 소모임 중 영화 모임에 들어갔다. ‘***’는 유서깊은 페미니즘 커뮤니티다. 2000년대,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기에 영페미들이 만든 온라인 기반 커뮤니티로, 생산자-소비자 연대 농업 단체(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CSA)인 ‘*****’은 비영리 법인으로 잘 운영되어 왔고, 영영페미 시대로 넘어와서는 ㄲ도 비교적 활성화된 모임이 된 것으로 안다. 영페미와 영영페미 중간에 낀 세대에 속하는 나로서는 **네트워크가 그나마 편안하게 느껴진다.


영화 소모임에서 8월에 함께 보는 영화는 <스펜서>였는데, 눈여겨 둔 작품이라 꼭 가려고 했지만 가족모임과 겹쳐서 못 가고, 대신 집에서 혼자 본 뒤 채팅방에 짧은 감상을 남겼다. <스펜서>는 근사한 영화였다. 영국 왕실의 기괴한 규범과 침묵에 목이 졸리고, 찰스 왕세자의 외도에 분노와 우울까지 겹친 다이애나가 가기 싫은 크리스마스 가족 모임에 가서 벌어지는 며칠 동안의 이야기다. 다이애나는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거식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엄근지’ 정찬에서 지정된 드레스를 입고 지정된 자리를 지켜야만 한다.

겉으로는 조금도 표출되지 못하는 다이애나의 분노와 공격성, 파괴력은 영화에서 어지러운 환각으로 묘사된다.

등장인물이 적지 않지만 고립된 그녀의 상황을 반영하듯, 소수의 인물만이 카메라 초점 영역으로 들어와 대사를 친다. 호화스럽고 정갈하며 억압적이고 절제된 왕실의 크리스마스 휴가를 관객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퀴어 코드가 후반부에 등장한다. (스포일러 있음!) 다이애나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한 왕실 보좌 직원의 의젓하고 따뜻한 고백…그게 다이애나의 목숨을 구한다.

그래, 이런게 레즈비언의 찐사랑이지.

제작진은 실존했던 유명인에 대한 논란을 우려해서인지, 다이애나가 고백에 답하는 장면은 넣지 않았다. 뻥 뚫린 결말이다. 그래도 마음에 들었다. 왕실, 세속, 일부일처제, 파파라치, 규율, 체면…이것들은 전부 가부장제의 부품들. 그 기계에 잘 맞지 않았던 다이애나 스펜서에게 대안적인 사랑이 필요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스펜서>의 퀴어 코드는, 그러니까 지극히 낭만적이고도 논리적인 상상으로 만들어졌다.

이미지 출처: Getty Images

요즘 매일밤 그걸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번 시차 적응은 유난히 더디고, 신변에 많은 변화로 인해 예민한 신경은 더욱 예민해져 불면증을 일으킨다. 잠들기 위해, 신경을 잠재우기 위해 내가 애용하는 것은 기둥 모양 바이브레이터이다. 연보라색 매트한 재질로 마감되어 있고, 끝부분 진동 조절기엔 큼직한 큐빅이 빙 둘러져있는, 예전에 프라이부르크에 딱 하나있는 샵 에로틱 마트(Erotik Markt)에서 염가에 산 것이다. 심플하고, 견고하다.
지난 주에 정신없이 짐정리를 하는 중에도 나는 그 파우치만은 잊지 않고 잘 쌌는데,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여행용 파우치다. 검은색 폴리에스테르. 가로x세로x너비 25x10x15센티미터. 그 평범하다 못해 지루한 가방의 지퍼를 열면 레인보우 줄무늬 패턴의 냅킨 세트와 바이브레이터 2종, 지스팟 딜도 하나, 핑거 콘돔 한 묶음이 나를 반긴다.  냅킨에는 영어로 ‘해피 아워 HAPPY HOUR'라고 크게 적혀있는데, 지난 주말에 K에게 위로 선물을 사주러 나갔을 때 동네 서점에서 보고 샀다.


검은색 파우치를 여는 것은 일종의 리츄얼이라고,

나는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자위하는 퀴어 여성의 존재를 잘 직면하지 못하는 이곳 한국에서 나는 약간의 가장(disguise)을 하며 생활해야 하겠지만, 거기에 대해 분개하거나 애도할 힘은 아껴두겠다. 거기 쓰기엔 아깝다. 사회 활동에 필요한 몇 가지 가면을 바꿔가며 쓰되, 하고 싶은 일들 또한 차례로 모조리 할 것이기 때문에, 내 힘은 거기에 쓰여야 한다. 검은색의 지루한 파우치를 보고 사람들이 방심한 틈을 타,

나는 지퍼를 열 것이다.


오늘밤엔 다이애나 스펜서를 연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함께 그것을 연다. 한참 또 잠들지 못해도 오늘은 덜 억울할 거다. 근사한 판타지가 있으니까. 내가 유혹하고 싶은 여자, 크리스틴. 인터뷰하고 싶은 여자, 크리스틴. 논문을 쓰고 영화를 연출하고 새로운 연기에 도전하는 크리스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이제껏 많은 조롱을 감수해온 크리스틴. 창백한 피부에 검은 머리 숏컷, 마르고 작은 몸, 티셔츠 밑자락은 꼭 매듭지어 묶고, 무심한 듯 청바지를 입는 크리스틴. 메트로 섹슈얼, 사이버 펑크, 톰보이. 목소리가 허스키한, 어느 자리에서나 말하는게 좀 힘들어 보이는 크리스틴. 이 모든 것을 다 합쳐서 섹시한 크리스틴.   


거기가 너무 축축해졌을 때 나는 해피아워 냅킨을 쓰고, 그 냅킨을 침대 옆으로 휙 던지고 어느샌가 곯아 떨어질 것이다. 해피아워 다음은 슬리핑아워.   



*이 글은 베를린 공대 CRC 1265 연구단의 의뢰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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