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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타 Oct 13. 2022

그럼에도 나는 사랑하길 계속했고,

퀴어 일기_위험천만한 레드넥 공동체에서 ‘안전한 공간’으로 표류해오다

나는 언제나 퀴어였다. 

10대 시절에도 나는 내 또래, 혹은 연상의 여자와 남자들과 성적으로 활발한 관계를 맺었다. 이는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는데, 내가 자란 곳이 시골의 보수적인 기독교 레드넥(red neck) 지역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환경이었다. 영화보다는 덜 극단적이었지만.

레드넥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은 담배를 씹고, 카우보이 부츠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픽업트럭을 몰고 다녔다. 로데오에 다녔고, 총도 많이들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때 내내 운동선수였다. 미식축구에서 스타터 포지션의 선수였고 야구팀이나 육상팀에서도 뛰었다. 미식축구팀 애들은 금요일 밤이면 우르르  시내로 나가 맥주를 마시곤 ‘호모 새끼들(faggots)을 잡으러' 다녔다. 동성애자로 보이는 사람 누구나 단체로 두들겨 팬다는 의미였다. 물론 나는 그런 ‘호모 사냥'에 한 번도 동참하지 않았다. 주변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당시 내겐 분명했다. 내가 페니스를 빠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당시 섹스나 연애를 닿도록 했지만 나는 언제나 너무 외롭고 툭하면 속으로 상처를 받았다. 나 역시 직장 내 성폭력의 생존자였다. 성적으로 학대당할 걸 알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녔다. 당시에도 그게 약자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게 일을 그만둘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당시에 나는 돈이 필요했고 경제가 안 좋아서 일자리가 귀했다.

한번은, 늦은 밤에 너무 화가 나서 알바하는 사무실 유리창으로 벽돌을 몇 개 집어 던졌다. 창문은 산산조각이 났다. 나의 은밀한 도덕적 승리감은 금방 사라졌다. 바로 다음 날 일하러 가서 아무것도 바뀐 것 없이 또 똑같은 일을 당했을 때. 

그동안 살면서 만난 거의 모든 여성들이 이런 성폭력이나 학대의 생존자였다. 너무 화나고 슬픈 일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왜 이런 현실을 용인하고 존속시키는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이걸 바꾸려면 대체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이런 질문들을 일찌감치 던졌고 그러면서 페미니스트로 정체화를 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성폭력의 생존자들에게 안전한 항구가 되어주려고 했다. 내 삶의 많은 여성들이 나라는 ‘안식처(sanctuary)’에서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고 말하곤 했다. 


연약함(vulnerability)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다. 내가 자주 느끼는 감정을 잘 설명하는 단어이다. 어릴 때 우리 집은 감정을 내보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사소한 규칙만 어겨도 맞거나, 때린다는 협박을 받았다. 차고 문을 닫는 걸 잊어버렸다거나 쓰레기 내다 놓지 않았다고 해서 맞았다. 항의하면 벌이 두 배가 되었다. 내 마음 속 사나운 감정의 바다에서 ‘나'라는 배는 오랫동안 버려진 듯 떠다녔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고 남들에게 감정이입도 잘하지만 근육질에 어깨가 넓은 남자로 살면서 기댈 곳, 쉴 곳을 좀처럼 찾지 못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나는 지브롤터 해협의 큰 바위처럼 굳세게 살아야 했다. 강하고 튼튼하고 무적인 그런 존재.

사람들은 나 역시도 치유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내가 영혼이 통한다고 느낀 사람들을 만난 곳은 히피들이 모이는 레인보우 게더링(북미의 국립공원이나 숲, 산지에서 장기간 자연 친화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는 일종의 여름캠프)이나 뮤지션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의 콘서트장, 그리고 패간(pagan;서양의 민간 무속신앙) 축제들이었다. 그런 장소들에서는 내가 부당하게 질문당하지 않고도 받아들여졌고 다른 퀴어들에게 지지와 인정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2014년에 지금의 네스팅 파트너(nesting partner)를 만난 것도 나에게 중요하다. 나는 이 관계에서 마침내 온전히 안전한 공간을 발견하고 나의 섹슈얼리티를 마음 놓고 탐색해왔다. 평생의 고통도 조금씩 치유해왔다.

그녀가 내게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세상에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가 그동안 글쓰기 등의 여러 활동들을 통해 페미니스트들을 위한 퍼실리테이터이자 힐러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본 것이 나의 치유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같이 사회의 여러 경계들에 도전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에로틱 파티에서 만난 한 여성분이 나에게 이런 칭찬을 했다. 내가 언제 어디서나 그냥 자 자신으로 자유롭게 퀴어의 삶을 사는 것이 인상적이라고.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토로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입으로 피를 토해내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진정성 있고 당당해 보였다니 기뻤다. 사실 정말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여전히 속에 눌러 담고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분의 말은 좋은 자극이 되었다. 앞으로 더 용기를 내서 나의 섹슈얼리티를 내보이라는 도전장 같다. 

우리 동네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 해적 여인 코스튬을 하고 나갔다. 골격이 크고 근육질인 나에게 화장하고 치마를 입는 것은 여전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녀가 도와준다


요즘 나는 나의 섹슈얼리티를 자유롭게 마음껏 기념하는 심정이다! 나는 논-바이너리이자 젠더 플루이드로 나 자신을 정체화하며, 이마저 바뀔 수 있다.

나는 그냥 섹슈얼한 존재이다.  퀴어.



글쓴이_ Rhino Rainbow
영한 번역_ 하리타


*이 글은 녹색당 유럽당원모임에서 발간하는 독립 잡지 '똑똑똑, 녹유' 19호 <가까이 다가온 미래 - 차별금지법 이후의 삶과 사회>에 먼저 실렸습니다. 무료 배포하는 잡지도 함께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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