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강연을 다녀온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었다. 모두를위한환경교육연구소 연구원 자격으로 ㅂ시에 있는 한 정신 장애인 지원 단체로 환경감수성 강의를 두 차례 다녀왔다. 기후 환경 문제가 점점 더 보편적인 ‘상식’과 ‘교양’의 영역이 되어가면서 연구소로 들어오는 교육 의뢰도 내용과 대상자 면에서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서글프면서도 반가운 일.
경기도에 있는 신도시인 ㅂ시는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널찍한 도로와 아파트 숲, 빼곡하게 들어찬 각종 편의 시설과 생활 업체들이 전형적인 신도시의 풍경을 만들었는데, 상가 전체가 공인중개사 간판으로 뒤덮인 건물만은 너무 낯설었다. 어쩌면 이것도 신도시의 특징인데 내가 서울촌뜨기여서 모르는 지도 모르지만.
그 건물 맞은편 7층에 센터 사무실 겸 교육장이 있었다. ‘정신 장애인 지원 4대 비전’이 적힌 입구 벽을 보고서야 내가 너무 일찍 왔음을 깨달았다. 점심시간이라 사무실은 거의 비어있고, 강의실에는 식사를 일찍 마치고 온 수강생 분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큰 TV화면에서 군무를 추는 아이돌의 유튜브 비디오가 떠들썩하게 나왔다. 준비한 강의와 분위기가 맞지 않아 조금 낭패감이 들었다.
나는 <기후 위기 시대, 마음 돌봄과 글쓰기> <에코 시민들의 이야기 기록하기> 두 가지 제목으로 함께 글 쓰는 시간을 준비했다. 그 날 첫 시간은 공동으로 시 한편을 완성하고 같이 낭송하는 구성이었는데, 차분하고 서정적인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공기를 떠도는 먼지 입자, 종이 위에서 끄적거리는 볼펜의 궤적, 옆사람이 ‘구름’을 발음할 때 혀를 굴리는 소리가 어떤지 집중하는 시간. 감각을 열고 지금의 공간을 음미하는 시간. 말하자면 그런 시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가사 없이 맑게 울리는 연주 음악을 한 곡 틀고 소박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얼마 전에 서울시 서초구로 이사왔습니다. 반려견 누룽지와 같이 살아요. 자작나무를 좋아하는 만 34살입니다.” “저는 조울병을 앓고 있어요.”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 말을 하면서 그 분들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나를 스스로 신뢰할 수 없었다. 나는 몽롱한 약기운이 무엇인지는 나름대로 알지만 ‘정신 장애’라는 말은 낯설어 한다. 그 단어가 쓰이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깜깜한 편이다. 이를 담담하게 인정하자, 하지 못한 말은 속에서 녹아 없어졌다.
공동으로 시를 짓기로 한 것은 그러면 힘이 덜 들어서다. 순전히 내 경험이긴 하지만, 언어를 조리있게 빚어내는 의식의 어떤 부분은 하수구처럼 막혀버리거나 석고처럼 굳어버리기 일쑤이다, 상태가 좋지 않을 때면. 약을 먹으면 먹은 데로, 안 먹으면 안 먹은 데로 글쓰기는 지독하게 어려워지곤 한다. 의외로 상당한 단호함과 날카로움을 요구하는 글 작업을 이곳에서 우리에게 부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대신 부탁하고 질문했다. ‘가을’하면 생각나는 것 5가지를 써 주시겠어요? 혹시 가을을 좋아하시나요? 왜 좋아하나요? ‘기후위기’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만약 기후위기 때문에 가을이라는 계절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다정하지만 집요한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이마를 팔에 대고 책상에 엎드린 사람은 둘이 있었다. 천진하게 손을 높이 들어 발표하려고 했다가 마이크를 잡자 불안하고 시무룩해 진 남자가 있었다. 내가 물어본 의도와는 달랐지만 운치있는 대답을 들려준 여자도 있었다. 소싯적에 읽던 랭보가 생각난다는 사람이 있었다. 대체로 모두들 애써서 적어주었고 말해주었고 떠올려주었다. 가을에 대한 것들을. 나는 그것들을 침착하게 받아 적으며 말들을 이리저리 붙였다 떼었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