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리타 Dec 26. 2022

“압사당할 것 같아요”

이태원과 핼러윈: 애도할 것, 기억할 것

2022년 11월 2일의 기록

“압사당할 것 같아요”


해시태그는 몇 시간 만에 갑자기 몇 만개가 새로 생긴다고 해도 괜찮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 단어를 중심으로 모인 셈이지만 딱히 못 견디게 붐비지 않는다. 붉은색 하트가 몇 만개 쌓인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올린 이미지나 텍스트를 수 만 명이 보고 갔지만, 그 흔적은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서버실에 로그 기록으로만 남고, 그 마저도 곧 사라진다.


요컨대 온라인 안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도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 서로에게 눌리지 않는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 물리적으로 집결하는 것은 다르다. 5만 명 정도가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은 서로의 숨을 눌러 막을 수도 있는, 서로의 몸을 눌러 밟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이 시간 우리는 다 같이 절감하고 있다.

지난 일요일에 아침, 내가 눈을 뜬 것은 여덟 시쯤이었다.

옆방에서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는데, 동생이 누군가와 차례로 통화하는 것 같았다. 잠이 덜 깬 것과는 다른,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스마트폰으로 손을 뻗어 밤새 주르르 쌓인 알람을 위에서 아래로 훑다가 봤다. ‘이태원 압사사고.’


압사사고가 무슨 말이지? 무거운 것이 어디 떨어졌나? 생각은 거기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

이태원은 나에게 퀴어 커뮤니티이면서 이주민 커뮤니티이다.

그 동네를 아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편’이라고 생각되는 곳이어서 일부러 찾아가 시간을 보내곤 한다. 지난주에 버스를 타고 사고 현장인 해밀톤 호텔 앞을 지나가면서는 자연스레 K를 떠올렸다. ‘12월에 그가 오면 이 버스를 타고 같이 놀러 와야지.’ 그는 자신에겐 너무 크고 혼잡한 서울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이태원 지역에는 관심을 보였다. 외국인들이 많이 보여서 자기에게 시선이 너무 쏠리지 않으니 편안해했다. 우리 아빠와 이태원 목욕탕에 찾아가는데 택시가 트랜스젠더 바가 모여있는 뒷골목을 지나갔을 때는 아주 즐거워했다.


K는 작년 핼러윈 데이에 혼자 이태원에 가서 인파를 느끼고 새벽에 돌아왔었다. 집에 있던 엄마와 나는 그가 걱정되어 뒤척이다가 도어록 소리를 듣고서야 마음 놓고 잤다.


작년과 올해의 그 시간, 그곳은 몇 분 간격을 두고 차례로 태어난 쌍둥이와 같다.  

*

150명에서 하나둘씩 늘어가던 사망자 숫자는 둘로 나뉘어 보도되었다.

간단하게 남자, 여자로 구분되었다. 그렇게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이 이런 때에도 생경하게 느껴질 줄 몰랐다. 여자, 남자라는 양극 사이에서 숨을 멈춰버린 사람들은 사실은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진 개별체들이다. 바이너리 스펙트럼 사이, 무수히 다양한 취향과 성향과 특성의 조합과 해체가 있다.


입술이 푸르댕댕해진 채로, 피부에 온통 멍이 든 채로 자가 생명 시스템을 멈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오래 거리에 ‘쌓여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생생하다.

갑론을박하던 여론은 경찰에서 공개한 녹취록을 계기로 비슷한 결로 모였다.

사고의 가능성을 경고하거나 경찰의 개입과 도움을 요청하는 신고가 사실은 11번이나 들어와 있었다.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러나 엇비슷한 지점에서 일제히 경찰에게로. 그러나 ‘여느 때처럼 붐비는 상황’ 정도로 판단한 것인지, 충분한 숫자의 경찰들이 적절한 곳으로 제때 달려가지 않았다. 경찰에게 이태원의 밤은 여느 때처럼 마약 단속반이 출동해야 할 시간이었다. 공권력은, ‘민중의 수호자’ 경찰은 외국인과 이주민과 퀴어가 높은 비율로 드나들고, 표기하는 방식이 여전히 제각각인 이국적인 기념일 ‘핼러윈’에 이태원을 보호가 필요한 장소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안전 관리나 질서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서울시 경찰 소속 81개 기동대 중 단 하나도 출동하지 않았다.    

오늘 피트니스 클럽에서 ‘이태원 참사 분석 뉴스'를 보며 러닝머신 위를 걸었다. 집에 TV가 없어 뉴스를 거의 보지 않게 되는데, 그때 그걸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어느 순간 심장이 조여왔다. 피부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하지만 뉴스를 꺼버리는 건 너무 나약한 행동인 것 같아서 그러지 못했다. 알아야 할 것들을 제때 똑똑히 알아두어야 나의 자리에서 역할과 책임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이 지금은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뿐이라고 해도.


몸의 거부반응을 무시하고 이를 악물고 러닝머신의 속도를 올려 한참 달렸다. 공황 발작이 오지는 않았다. 나도 여간해선 잘 참는다. 이 정도는 참아야,  억울한 인명 사건 사고가 잦은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끔찍하지만 그렇다.  
 
이번 참사를 함께 겪은 사람들은, 우리들은 언젠가는 핼러윈 데이를 다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될까? 언제쯤? 슬프고 끔찍하고 두려운 기분 없이 말이다. 여객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건너는 것도 여전히 좀 불안한데 언제쯤.…


나에게 핼러윈은 별 감흥을 주지 않는, 오래전 따라 읽은 영어 교재 속 문장 ‘trick or treat’ 같은 것이었다가, 독일에 사는 동안에 특별한 날이 되었다. 2주일 전부터 신이 나서 코스튬을 궁리하고 얼굴에 변장을 하고 하우스 파티를 주최해 동네 친구들과 밤새 춤추고 노는 날이었다.


무엇보다,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일어난다고 믿었다. 산 자와 죽은 자들 사이 경계가 희미해지고 두 세계를 막고 있던 장막도 펄럭거리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영적인 현상이.

어쩌면 지금도 그 장막 뒤에서, 황망하게 떠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더 안전한 이태원 풍경을. 겸허한 변화를.


*이 글은 베를린 공대 CRC 1265 연구단의 의뢰로 작성되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세심한 '너'들을 마중나와 주실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