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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Sep 21. 2020

우리의 현실이 당신의 비극이 되지 않기를

어슐러 K. 르 귄, <로캐넌의 세계>

* 소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출처: 본인 찍음

    트로이아 전쟁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그럼 진짜로 파리스는 황금 사과를 어느 여신에게 줄지 고민했을까? 아킬레우스는 정말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일까? 어디까지가 진짜고 또 어디까지가 신화일까? 어슐러 르 귄의 '헤인 시리즈' 첫 장편인 <로캐넌의 세계> 또한 그런 세상을 그리고 있다. 신화와 현실이 뒤섞인 세계.  


    조상이 잃어버린 목걸이를 돌려받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는 한 행성에서 셈레이라는 여인이 찾아온다. 그의 방문이 전설이 된 후 몇십 년이 지나, 당시 그를 직접 목격한 인류학자 로캐넌은 셈레이의 행성으로 탐사를 떠난다. 탐사 중 알 수 없는 적의 공격으로 동료를 모두 잃고 혼자 남게 된 로캐넌은 그의 행성과 통신할 수 있는 엔서블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로캐넌의 고향 별에서는 셈레이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지만 실화다. 반대로 셈레이의 별(포말하우트 II라고 불린다)에 있는 스타로드는 어떨까?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나타나 그곳에 살고 있는 종족의 땅을 파괴하고 그들을 위협하는 스타로드. 그의 이야기 또한 시간이 지나 전설처럼 내려오지만 실화다. 포말하우트 II에는 청동기와 철기 시대를 살고 있는, 아직 과학적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는 문명이 있다. 내가 만약 그런 곳에 살고 있는 지적 생명체라고 생각해보자. 갑자기 어떤 외계인이 (나는 알 수 없는) 기술로 무장한 무기를 가지고 와서 내가 사는 세계를 부수고 있다면, 당연히 그런 모습은 (과학 기술임이 분명하지만) 초현실적이고 신화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할머니가 되어 '라떼는 말이야'라며 장황하게 늘어놓고 손녀는 '할머니 거짓말!'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모두가 실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나로 인해서요. 내가 막았기 때문이죠. 내가 레이디 셈레이를 만난 후 우리 동족에게 가서 우리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이 세계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말했기 때문이에요. 왜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괴롭히느냐고, 우리가 무슨 권리로 그러느냐고. 하지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최소한 몇 년에 한 번씩 이리로 오는 사람이 있었을 거요. 당신들은 이 침입자들 손에 온전히 휘둘리지 않았을 것이고…”  (p. 65)
“(…) 켄타우루스, 어스(지구), 세티의 공격적인 도구 사용 인류들이 선도하는 연맹은 지성 생명체의 특정 기술과 능력과 잠재력을 경시했고, 너무 편협한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해 왔다.” (p. 69)


    먼 행성에서 전설이 된 스타로드의 존재는 너무나도 있을 법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지구에 살고 있는 현 인류가 먼 우주의 행성과 그곳에 살고 있는 종족을 발견한다면, 인류는 분명 그 행성의 스타로드가 될 것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믿고 있다. 인류에게는 발전이나 개척이라는 언어를 앞세워 학살과 착취를 가한 역사가 이미 있지 않은가. 이 작은 지구에서 조차도 그들은 (우리는) 정복하려는 야망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묻고 싶다. 새로 발견한 행성(또는 대륙)에 사는 원주민은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누군가에게 착취당하는 것이 당연한가? 누가 무슨 권리로 그들의 문명을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판단하는가? 소설에서 그데미아르와 피안 종족은 텔레파시 능력으로 서로 소통하고, 로캐넌 또한 적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배워 포말하우트 II를 기술과 무기로 무장한 연맹 반란군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다. 안기야르 종족은 "공격은 터부, 이종 간의 전쟁은 사악한 짓(p. 73)"이라고 말한다. 텔레파시 능력은 과학 기술의 발전보다 열등한가? 이종 간의 전쟁은 사악한 짓이라 믿는 종족의 문명이, 전쟁을 일으키는 종족의 문명보다 열등한가? 인류가 다른 행성의 스타로드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질문에 정직하게 마주해야 할 것이다. 




“쿄는 제 동족을 반쪽 인간이라 불렀다. 하지만 쿄 자신은 더 이상 완전한 그들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준 새 옷을 입자 모습도 같아 보였고 움직이는 것도 비슷했지만, 그래도 그들 사이에서 쿄는 외따로 떨어져 서 있었다. 그건 그가 자유로이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이방인이라서였을까, 아니면 로캐넌과의 우정을 통해 그가 변했고, 그래서 좀 더 고독하고 좀 더 슬프며 좀 더 완전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p. 167)
"그는 쿄와 함께 있으면서 마음의 대화를 조금 배웠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의 마음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에게 충실하고 서로를 사랑한다면 이해 역시 서로 함께 하는 것이어야 했다." (p. 181)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면 아마 소통과 단절이 아닐까. 같은 뿌리에서 온 그데미아르와 피안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한 후 서로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피안은 스스로를 '반쪽짜리 인간'이라 부른다. 아무리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텔레파시 능력이 있다고 한들 서로를 잊고 단절된 채 살아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로캐넌이 '적의 마음을 읽는 텔레파시'로 이 행성을 구했다는 점이 재미있다.) 행성 연맹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그데미아르가 밖으로 나가 그 기술을 피안에게, 또 리우아르와 함께 나누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굳이 로캐넌의 도움이 필요 없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을지도 모르겠다. 


    로캐넌은 여행 중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피안, '쿄'를 만난다. 이방인의 공격으로 그는 동족을 잃었으며 그가 살던 마을 또한 파괴되었다. 그 후 쿄는 로캐넌을 만나 함께 여행하고 우정을 나누며 더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로캐넌 또한 쿄를 만나고, 행성을 지키기 위한 긴 여정을 통해 포말하우트 II의 종족을 더 깊게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왕국 하나의 값어치가 있는 목걸이를 그와 함께한 올기요르 동료를 구하기 위해 포기할 만큼 (p. 131). 생각해 보면 세상 일이 다 그런 거 아닌가? 서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단절되어 있다면 어떻게 서로를 구하고 지킬 수 있을까. 마음을 읽는 텔레파시 능력이 있다 한들 서로 함께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나와 다른 남을 더 알고자 하는 노력과 그들에 대한 이해, 사랑이 있었기에 결국 로캐넌이 셈레이의 행성을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남을 돕는 일은 남을 이해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믿는다. 그 믿음은 만국 공통을 넘어 우주 공통인가 보다.




    즐겁게 읽었지만 이 소설을 완벽하게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이 읽으며 '백인 구세주 클리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포말하우트 II에서 일어난 스타로드의 착취는 이방인인 로캐넌의 이전 세대가 자행한 일이었다. 몇 년이 흐른 후 셈레이의 행성에서 일어나는 적의 공격과 위협에서도 구하는 인물 또한 이방인 로캐넌이다. 외부인인 행성 연맹이 붙인 이름 '포말하우트 II'에서 일어난 비극은 외부인으로부터 일어났고, 그 비극으로부터 구하는 인물 또한 외부인이다. 그리고 그 행성은 외부인의 이름을 따 '로캐넌의 세계'라고 부른다. 행성을 구하기 위한 여정에서 많은 원주민이 희생됐다. 특히 그가 얻은 '적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의 대가는 그와 함께한 동료인 안기야르 종족 모지언의 목숨이었다. 로캐넌과 함께 한 원주민들의 이야기도 신화가 되었으나, 그 세계는 왜 '모지언의 세계'가 되기보다는 '로캐넌의 세계'로 명명되었을까. 나는 그 행성을 그데미아르와 피안, 안기야르와 올기요르가 자신의 고향을 뜻하는 그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




    그럼에도 <로캐넌의 세계>는 충분히 멋진 소설이다. 과학 기술과 신화가 만난, 시각적으로 정답이 없는 이 세계를 나만의 방법으로 상상해보는 경험. (특히 날개 달린 커다란 고양이처럼 생긴 동물 '바람말'을 상상하는 일이 제일 좋았다. 고양이는 최고다.) 그리고 그 낯선 세계에서 발견되는, 낯설지 않은 우리 인류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일까지. 직접 경험해 볼 수 없는 곳에서 익숙한 감정을 느끼는 것. 그게 SF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아직 헤인 우주는 <빼앗긴 자들>과 <로캐넌의 세계>로 여행해 본 것이 전부다. 앞으로 알아갈 곳이 더 많다는 사실에 가슴이 뛴다.



전문 출처: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로캐넌의 세계> 황금가지, 2006.

 

헤더: F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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