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마케터-CRA, 그리고 직업관 다시 짚어보기
Do not bend (Photo inside)
구부리지 마시오 (사진이 들어있음)
말 그대로 노파심이라는 게 이런 걸까. 사진이 지구 반대편 먼 길을 거쳐 가는 동안 행여나 구겨질까, 노인은 많이 걱정했던 것 같다. 나는 시리얼 상자를 가위로 자르고, 그것을 풀로 사진의 뒷면에 단단히 붙이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얀 밤, 태양이 뭉근한 빛을 내는 창가에 앉아 가위와 풀과 사진 그리고 편지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더듬거리는 노인의 쭈글쭈글한 손을. -「일의 기쁨과 슬픔」, 탐페레 공항 , 211p
이른 아침, 출장 차 광주로 내려가는 KTX 안에서 난 울고 있었다. 장류진 작가의 단편집인「일의 기쁨과 슬픔」중, 재미있고 따뜻한 이야기로 기억하는 마지막 단편인 "탐페레 공항"이 몇 년 전과 다른 톤으로 읽혔던 것이다. 조마조마하며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던 나는 주인공이 핀란드 노인에게 받은 엽서를 6년 만에 봉투에서 꺼내보는 장면에서 조금 무너졌다. 예상과 다르게 읽히는 소설이, 어리둥절하게 쏟아지는 눈물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옆에 앉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얼른 마스크에 얼굴을 묻었다.
직업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첫 사회생활은 대학 병원 간호사였다. 보수적이고, 수직적이고, 착취적이었던 나의 첫 직장. 출근길은 날마다 책임감이었다. 이 직업을 선택한 나에 대한 책임감, 1인 가구 밥벌이의 책임감, 부모님의 기대에 걸린 책임감 등 온갖 종류의 책임감을 들쳐 업고 일하면 도저히 상식 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병원 일도 잠시간은 꾹 눌러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종류의 당위가 오래 가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책임감이 불합리에 대한 분노를 더 이상 틀어막지 못하고 전복되던 날, 결국 사직서를 써냈다. 입사한 지 2년이 조금 못 미친 때였다.
휩쓸려 선택한 첫 직업과 달리, 두 번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자아실현과 맞닿는 일을 업으로 하고 싶었다. 여러 선택지를 요모조모 따져보고 들어간 두 번째 회사는 헬스케어-IT 회사였다. 마케팅팀 소속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마케팅 플랜에 따라 액션을 실행하면서 처음으로 일이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이 삶과 일치하던 시절이었다. 야근을 해도, 주말에 노트북을 열고 일해도 재미있었다. 일하지 않을 때에도 시간을 쪼개 업무 관련 서적을 읽거나 강의를 들었다.
한동안 해결되었다고 믿었던 일에 대한 고민은 새로운 기출 변형의 모습을 하고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입사한 지 일 년 반쯤 되었을 때, 오랫동안 준비했던 서비스가 내부 사정에 의해 런칭을 기약할 수 없게 되자 그 여파로 대부분의 마케팅이 기약 없이 밀리게 되었다. 마케팅 업무의 공백은 개발 외 others의 업무들이 넘어와 자리를 메웠다. 갖다 붙이면 모두 내 일이 되어버리는 마법. 이래서 어른들이 전문직을 하라고 한 거였나. 손바닥 뒤집듯 엎어지는 업무 분장과 회사의 스탠스에 나는 일할 동력을 잃어버렸다. 해답을 찾았다고 믿었던 것만큼 상실감은 진했다.
상처 받은 내가 선택한 세 번째 직업은 임상시험모니터요원(CRA)이었다. 임상시험의 진행 과정을 감독하고 확인해야 하는 업무 특성 상, 의학적인 배경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간호사 면허와 경력, 그리고 제약회사와 협업했던 경험이 있었던 나에게 가장 높은 몸값을 쳐주는 직업을 두고,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돈벌이 수단에 자아실현 까지 바라지 않았다. 큰 규모의 조직이 주는 안정감, 터치 없는 자율적인 분위기, 명확한 업무 영역, 간호사 면허와 경력이 반영된 연봉이 그렇게 '따뜻하고 푹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직업 선택에 변증법을 대어 본다면, 학부를 따라 순리적으로 선택한 간호사가 정,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헬스케어-IT 회사의 마케터가 반, 그리고 두 직업의 양쪽을 조금씩 굽히고 들어간 지금의 직장이 ‘합’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마지막 직업에 만족하고 살았다. 자아 효능감 따위를 직업에서 찾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값어치 있게 매겨지는 나의 셀링 포인트를 추려내 적당히 적당하게 일을 하는 삶은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한지.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이전 시간들을 겪었던 것일까. 나름 괜찮은 밸런스의 ‘합’과 함께 어느덧 근속 연수는 3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변화를 눈치챈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요즈음 일이 유난히 힘들게 느껴졌다. 업무량에 지친 것과는 다른, 처음 겪는 양상이었다. 막연히 아무것도 하기 싫고, 기운은 없고, 어딘가 붕 뜬 기분. 일태기가 온 것일까. 주변에 찡찡거려도 보고, 선배를 불러내 하소연도 해 봤지만 뾰족한 수는 없이 상태는 지속되었다. 그렇게 풀리지 않던 문제의 근원을, 광주로 가는 KTX 안에서 눈물을 쏟으며 알게 되었다. 나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있었다.
세 번째 직업으로 건너오며 나는 견적서 하나를 만들었다. 연봉 얼마, 복지 얼마, 규모 얼마, 회사의 네임밸류는 플러스알파로. 자아 효능감이니, 업무에 대한 흥미 같은 철없는 기준은 아예 고려 대상에 없었다. 나는 이 견적서에 내 회사를, 이직할 수 있는 회사와 없는 회사를, 남들이 좋다고 하는 회사를 넣어보고 내가 제대로 대우받고 있는지 수시로 점검했다. 견적서는 똑똑했다. 총점의 합과 사회에서 생각하는 직업 가치의 정도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이 딱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직업 만족도와 비례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찌글거리는 마음을 대충 잡히는 돌로 눌러 두었다. 영화야,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야? 산으로 들어가서 살 것 아니면 그냥 조용히 있어.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 탐페레 공항 , 209p
나는 알고 있었다. 자아 효능감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월급 주는 조직에서 기대할 덕목이 아니지만 또 아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 적어도, 나는 그렇게 귀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일이 부쩍 힘든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내적 동력 없이 외부적인 요인에 기대어 하는 일은 쉽게 지치고 소진되었다. 나는 내가 가진 것들 중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들을 살뜰히 모아 견적서의 총점이 제일 높은 회사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비슷한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내 두 번째 서랍 깊숙한 곳에 들어 있던 엽서는 그것이었다. 빳빳한 시리얼 상자를 등에 대고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납작히 누워 기다리고 있었던.
오랫동안 합이라고 생각해 온 것을 정으로 돌리고, 다시 새로운 합을 찾아 떠나야 할 때인 것 같았다. 3년이면 그래도 길었지. 직업이 또 한 번 뒤집힐지, 내가 뒤집힐 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러한 식으로 반복하다 보면 나의 '합' 비슷한 어딘가 가까워질 수 있지는 않을까. 그것이 핀란드 노인이 보낸 엽서에 대한 나의 미루고 미뤘던 답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