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한 집에 정이 영 붙지 않는다.
퇴근 후 녹아내리는 몸으로 신발을 벗고 장판을 디디니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온다. 중앙난방 밸브가 고장 나 정상화되는 데 며칠이 걸릴 거라는 엘레베이터 안내문이 떠오른다. 몇 발짝 걸어 들어오면 보이는 거실은 한중간에 예전 집에서 가지고 온 일인용 리클라이너가 맥락 없이 놓여 있고, 못 다 푼 이삿짐이 그 옆에 박스 떼기로 굴러다니는 썰렁한 모양새 그대로다. 삼 주 전에 주문한 냉장고는 아직도 배송 전이다. 나는 싱크대 옆 조리대에 놓여있는 미지근한 생수를 따라 마신다.
결승점이라고 생각했던 지점이 알고 보니 반환점일 때가 있다. 이번 이사가 내게 그랬다. 집을 보러 다녀야 하는 시기에 두 번째 코로나를 호되게 앓느라 시간에 쫓기며 어렵게 이사할 집을 구했다. 대출을 실행할 때에는 심사 일정이 도와주지 않아 마음을 졸였고, 이삿날에는 쩨쩨한 집 주인과 감정싸움까지 해 가며 진 빠지게 싸우고 나서야 간신히 지금 집의 잔금을 치를 수 있었다. 늦은 저녁께 새집에 이삿짐만 넣어 놓고, 대충 이불만 꺼내 잠을 청하던 그날은 그래도 결승점을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눈 떠보니 그게 반환점일 줄이야.
누수로 곰팡이가 슨 천장, 아직 달려지지 않은 커튼, 너저분한 콘센트 선, 한참을 기다려야 나오는 온수, 고장 난 보일러와 싸늘한 방바닥. 집에 정이 붙지 않는 이유는 구체적이고 다양했다. 싸기라도 하면 몰라. 나보다 나이도 많은 주제에 아파트라고 보증금은 콧대가 높았고, 관리비도 그랬다. 아직 이사 박스에서 꺼내지도 못한 물건이 돌아다니는데 은행에서는 착실하게 전세대출의 이자 납입 예정일을 안내해 나를 심란하게 했다. 나는 관리비와 보증금의 이자를 더해 한 달 30일로 나눠보았다. 그리고 이 집에서 하루에 잠자는 비용으로 이 돈을 내는 것이 합리적인지 자꾸 되물었다.
눈길 가는 족족 손댈 곳이 보이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있는 그대로 완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채광이었다. 남서향으로 크게 나 있는 거실 창을 따라, 정오가 넘어가면 거실 오른편부터 깊숙이 해가 들어왔다. 해는 커튼이 달리지 않은 창 너머로 매일 거실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착실히 훑어낸 다음 옆 동 아파트 뒤편으로 노을을 뿌리며 사라졌다. 서쪽으로 사라지는 노을은 특히 마음을 빼앗는 것이 있어서, 나는 이 시간에는 재택근무를 하다가도 나와 지는 해를 챙겨봤다. 이전 집은 창이 작아 채광을 호사스럽게 누릴 수 없었고, 남동향이라 노을은커녕 늦게 일어나면 햇살을 구경도 못 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기에는 큰 가점을 줄 수 밖에 없었다.
노을이 끝나면 다시 못생긴 집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가구가 없어 목소리가 왕왕 울리는 안방 침대에서 일어나 아직 들어오지 않은 텅 빈 냉장고 자리에 서서 미지근한 생수를 마시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생각했다. 어쨌든 저쨌든 2년은 살아야 하니, 당장 이사할 게 아니라면 채광 좋은 것으로 원만하게 합의 보자. 셀프 협박은 효과가 있었다. 그 날부터 집은 천천히, 조금씩 정리되어 나갔다. 하루는 행거를 정리하고, 그다음 날은 세탁기와 가스레인지를 연결했다. 그다음 날은 책상과 서랍을 뒤집고, 그다음 날은 친구를 불러 커튼을 달았다.
집에 맞는 물건도 하나씩 들였다. 첫 번째로 고른 것은 널찍한 원목 테이블이었다. 가로 160cm, 폭이 90cm인 넉넉한 테이블은 작업대로, 식탁으로도 쓰기 좋았다. 높이가 살짝 낮아 내게 편안하게 맞았고, 빔프로젝터를 볼 때도 시야에 걸리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일주일 간격을 두고 테이블과 어울리는 낮고 넓은 의자 두 개와 3인용 원목 소파도 들였다. 모두 따로 샀지만, 높이를 까다롭게 본 덕분에 모아놓고보니 세트로 맞춘 듯 해 뿌듯했다. 거실 반대편에는 당근에서 만 육천 원에 입양한 아레카야자를 두고, 그 옆에는 오늘의 집에서 고심하여 고른 사다리 선반을 놓았다. 계속해서 배송 일정이 미뤄져 속을 태우던 냉장고는 주문한 지 꼭 한 달이 되던 날 들어왔다.
제일 마음 쓰이게 했던 작은 방의 누수는 보험사의 손해사정사와 두 팀의 시공사가 다녀간 끝에 12월 초로 공사 날짜가 정해졌다. 집주인은 이사 오자마자 고생이 많다며, 공사하는 김에 자잘한 집수리를 같이해주기로 약속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긴 통화를 마치며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내 말에, “사는 데 불편함이 없어야지요.”라는 당연한 집주인의 답변은 특히 고맙게 들렸다.
부지런히 가구를 사서 들이고, 물건들의 제 자리를 찾아주는 몇 주가 지나갔다. 이제 집을 둘러보면, 어디를 보더라도 내가 매만지지 않은 구석이 없다. 나는 날이 좋은 주말 오후에 거실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을 따라 자리를 옮겨가며 채광을 누려본다. 이제야 이사가 끝나가는 것 같다. 햇빛에 달궈진 거실 바닥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20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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