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직도 잠을 못 잘까요. 벌써 퇴사한지 두 달인데요.
정신이 든다. 적막을 더듬어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다. 세 시가 못 된 시각. 다시 눈을 감아보지만 이미 뇌는 둔하게 시스템을 부팅하기 시작했다. 나는 반 시간을 더 뒤척이다 결국 침대를 벗어난다. 수면이 부족한 뇌는 겨우 이 정도의 휴식으로 제 기능을 기대하지 말라고 툴툴댄다. 내가 할 소리다.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비슷했다. 남쪽 지방에서 한 달 살기나 편도 열 시간이 넘는 먼 나라로 떠나라는, 본인의 소망이 투영된 그런 말들. 나는 대부분 떫은 표정으로 그러마 대답했고, 사정을 조금 아는 이들에게는 집 밖을 벗어날 기력도 없다고 했다. 그 와중에 누구나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면 한 달만 푹 쉬어보라는 거였다. 한 달만 있으면 심 봉사도 눈 뜨고, 앉은뱅이도 벌떡 일어선다는 퇴사자들의 간증을 흘려듣는 척했지만 내심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나면 나도 여행을 가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추석이 지나고 긴 여름이 꺾일 때까지 나는 여전히 새벽에 눈을 떴다.
"왜 아직도 잠을 못 잘까요. 벌써 퇴사한지 두 달인데요."
불면증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을 던져보았으나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외에 다른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속 시원하게 답을 말해주면 좋으련만, 치료적 의사소통은 답답한 구석이 있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상담이 마무리될 때쯤 '긴장이 풀리면 자연스럽게 잘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어깨를 만져보았다. 굳어진 지 오래된 어깻죽지를 따라 바짝 긴장한 승모근이 느껴졌다. 무엇이 나를 긴장하게 할까.
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된 이후 안팎으로 나의 자리를 찾는데 많은 품을 들였다. 독립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면서도 나를 잃지 않는 일. 그 중간의 적절한 밸런스에 관심이 많았다. 성장욕과 경제적 독립은 좋은 연료였다. 나는 연료의 배합 비율을 조절해 가며 여러 실험을 했다. 월급의 대가로 많은 것을 지불해야 할 때엔 경제적 필요성에서 이유를 찾았고, 궁핍한 시기엔 당장의 보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경험을 한다고 스스로를 토닥였다. 몇 년에 걸쳐 직업을 바꾸기도, 소속을 옮겨보기도 했다.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적응해 냈다. 돌아보면 부지런히 산 것 같은데, 적절한 밸런스라는 것은 딱히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돈을 좇거나, 자아를 찾아 통 큰 베팅을 하는 쪽이 더 승산이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찌 되었든 나는 내 선택에 대해 감당해야 할 몫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허투루 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야근하면서도 영어 공부를, 운동을, 이직 준비를 했다. SNS에서는 20대를 위한 신입 자리는 없고, 40대부터는 나이 때문에 이직이 어렵고, 30대는 3인분을 하느라 갈린다는 조각 글이 공감을 사 여기저기 떠돌았다. 십 년 뒤 나마 자리를 보전하려면 30대에 악착같이 일하고, 연봉을 차근히 높이며 부지런히 이직해 40대 초반엔 한 직장에 정착해야 한다고들 했다. 커리어에 자신이 없다면 월급은 아끼고 쏠쏠한 부업을 한 두 개쯤 병행하면서 재테크에 힘쓰는 방법도 있었다. 노후 자금은 지금 모으기 시작해도 늦었다고 호통치는 경제 유튜버와 2072년 기대수명은 91.1세가 될 것이라는 뉴스 클립이 동시에 유튜브 알고리즘을 탔다.
분명히 그런 말들에 마음이 동했던 때가 있었다. 일잘러, 커리어, 일과 삶의 일치, 경제적 자유, 파이어족 … 이제는 뭉근한 두통을 줄 뿐인 단어들. 그 단어들에 몰두했던 일이 아주 오래전처럼 여겨졌다. 이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뭔가를 좋아했던 감정이 아득했다. 일하다 소리를 질렀고, 친구들의 연락을 피했다. 지하철 속 불특정 다수의 발작적인 소음이 견디기 힘들어 명상 음악을 크게 들으며 출근길을 버텼다. 대체 뭐가 이렇게 힘들까.
‘비빌 언덕이 있어서 그래.’ 2030 청년층의 쉬었음 인구가 70만 명이 넘었다는 통계청 발표를 다루는 기사엔 이런 댓글이 많았다. 비빌 언덕이 있으니 아쉬운 줄 모른다는 문장은 ‘요즘 애들은 나약하다’의 일갈로 이어졌다. 사회 문제를 개인의 노오력으로 눙치려는 꼰대들의 댓글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문장은 옅은 음영으로 길게 남았다. 내 삶이 남들과 특별히 다른 것은 없었다. 일주일에 오 일 출근하고, 종종 취미 생활을 즐기며 가끔 휴가를 갔다. 아직 부모님이 일하시는 것이나 특별히 간병 필요한 가족 없이 내 한 몸만 건사하면 되는 상황을 따져보면 나는 운이 따르는 쪽이었다. 여기에서 한 조각만 슬쩍 어긋나더라도 갈리든지 썰리든지 일터로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발 뻗을 자리를 보면서 누워보는 중인가. 아니, 이건 대한민국의 거대한 가스라이팅 아닌가.
이게 거대한 가스라이팅이라면, 무엇이 달라질까. 내가 속한 사회가 개인을 좀먹는다고 해도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나는 나를 먹여 살려야 했다. 행복 회로를 돌려 노동 조건이 파격적으로 좋아지고, 느슨한 사회 분위기가 찾아온대도 ‘그 40대’ 이후의 일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살아야 할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나. 다들 바보라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쉬면서 불안할 바에는 돈을 벌면서 괴로워하는 게 낫지 않을까. 회사에 다시 들어가면 얼마나 일할 수 있을까. 배터리는 소모품이라 방전과 충전을 반복할수록 수명이 짧아지는데, 나는 앞으로 몇 번의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을까.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아니, 계속 일을 할 수는 있기는 할까.
쉼 없이 돌아가는 바깥 세상과 침대 속 멈춰버린 내가 있었다. 불멸의 밤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202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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