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힘든 퇴근길이었다. 오늘은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던 재수 없는 하루였다. 생각할수록 짜증 나고, 억울했다. 이렇게 또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맷집이 늘었네. 나는 그나마 오늘 하루가 끝난 것에 감사하며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올리브*과 눈이 마주쳤다. 집 가는 길목에 있는 지점이라 가끔 퇴근길에 들리는 곳이었다. 살 것이 생각나 나는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가 진열대를 향해 직진했다. 여러차례 들락거린 매장이었으므로 이 곳 사정은 훤히 꿰고 있었다. 물건을 골라 계산대로 향하는데 갑자기 매장과 어울리지 않는 큰 소리가 들렸다.
"OO씨,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두 달이면 다른 친구들은 알아서 눈치껏 바쁘면 서로 도와 가면서 일하는데, OO씨는 동료가 뛰어다니는 것 보면서 멍하니 서 있기만 할 거야?"
모른척하기에는 너무나 큰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소리의 근원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계산대 안쪽에서 매장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큰소리로 알바생을 혼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매니저는 단단히 화가 나 보였다. 그 앞에 알바생은 두 손을 모아 쥐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여러모로 당황스러웠다. 매장에서 대놓고 알바생을 혼내는 광경도 그랬지만, 혼내는 사람과 혼나는 사람이 계산대를 꽉 채우고 있어, 계산 할 수가 없는 이 상황이 더 당황스러웠다. 슬쩍 매장을 둘러보니, 나 말고도 대여섯명 정도의 손님들이 보였다. 모두들 들리는 소리를 모른척하느라 안간힘을 쓰는 얼굴이었다. 개 중에는 나처럼 계산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OO씨, 여기 뭐하러 온 거예요? 하... 진짜 뭐 하자는 건지 난 도저히 모르겠네?"
큰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매니저는 그렇게 꽤 오랜 시간 화를 내다, 드디어 본인이 계산대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매니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알바생과 함께 계산대 뒤쪽의 스텝 공간으로 사라졌다. (스텝 공간에서 계속해서 화난 목소리가 웅웅대며 들려왔다) 상황이 일단락된 것을 확인한 다른 알바생은 얼른 계산대에 섰다. 손님들도 얼른 그 앞에 줄을 섰다. 나도 줄의 끝에 섰다.
나는 앞의 손님들이 계산하는 것을 기다리며 멍하니 생각했다. '왜 굳이 손님들이 있는 상황에서 저렇게 큰 소리로 혼을 냈을까.', '화가 날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저렇게 폭발한 거겠지? 무엇보다 매장을 잘 아는 사람일 텐데 알바생 하나 무안 주려고 저렇게 한 건 아닐 것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무슨 일을 얼마나 잘못했다고 저렇게까지 혼을 내냐.', '뒤에서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
줄은 천천히 줄어들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아까 그 알바생이 스텝 룸에서 나와 계산대에 섰다. '다음 분, 계산 도와드리겠다.'고 하는 목소리가 축축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눈두덩이는 퉁퉁 불어 있었다. 부러 밝은 목소리로 꿋꿋하게 계산을 하는 알바생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는 필요한 대답만 빠르게 하고 서둘러 계산대 앞을 떴다. 힘내라는 말을 건넬까 잠시 고민했지만, 오지랖이란 것을 너무 잘 알기에 그 말은 꿀꺽 삼켰다.
안 그래도 우울했는데, 더 우울해졌다. 나는 사회 초년생들의 야들야들한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우연히 그의 야들야들한 마음이 처음으로 깊은 상처를 입는 광경을 훔쳐본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마음이 그처럼 야들야들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땐 마음이 너무 여려서 모든 것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오늘 그가 받은 상처는 곧 아물 것이다. 상처가 아물고 나면 마음은 조금 덜 야들해질테지만, 자본주의 맷집은 조금 더 단단해질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상처가 너무 깊어 회복하는 게 너무 더디지 않을지, 오늘 일이 그의 여린 마음에 불가역적인 손상을 입힌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다시 그 매장에서 그를 볼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너무 멀리 갔다. 내 깨진 멘탈이나 잘 추스리자. 남 걱정하지 말고.
나는 이부자리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꼬박 만 삼개월이 지난 어제. 나는 퇴근길에 올리브* 매장에 들렀다. 그동안 같은 매장을 몇 번 방문하긴 했지만, 평일 퇴근길에 들른 것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골라 계산대에 섰다. 카드를 꺼내 계산대에 서 있는 사람을 보니 어, 그때 그 알바생이었다. 알바생은 낯선 손님을 응대하며 능숙하게 물건들을 계산해주었다. 눈은 똘망거리고, 목소리는 경쾌했다. 나는 왠지 또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서둘러 매장을 나섰다.
물건을 들고 집에 돌아가면서, 어쭙잖게 알바생의 야들야들한 마음과 그가 받을 상처에 대해 염려한 것이 생각났다. 머쓱하면서, 동시에 기분이 좋아졌다. 머쓱함과 흡족함을 동시에 느낀것은 처음이라 느낌이 묘했다. 역시 사람은 훨씬 강한 존재야. 나는 울면서 환자를 보던 신규 간호사 시절과, 그 시절 덕분에 만들어진 나의 자본주의 맷집에 대해 생각했다.
그 친구가 같은 매장에서 계속 일을 해 주어서 고마웠다. 덕분에 나도 조금 용기를 얻은 기분이었다. 알바생의 마음에 새롭게 돋아난 자본주의 맷집이 내게도 느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