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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니 May 30. 2021

헬스케어 마케터에서 임상시험 업계로

CRA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모니씨, 경력이 특이하네요. 어쩌다 CRA로 지원하시게 되신 건가요?


CRA로 지원했던 면접에서 받았던 질문이다. 


동시에, 이 질문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기도 했다. 간호사 전공 살리기 싫다면서, 병원 냄새나는 것들은 다 싫다고 말해 놓고, 나는 왜 돌고 돌아 병원 냄새나는 임상시험 업계로 돌아오게 되었는가. 그래,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참 구질구질하고 지난한 과정들이 있었지...


면접관 앞에서는 지원자다운 태도를 유지하며 최대한 간결하게 답변을 했다. 너무나 예상 가능한 질문이었기에 답변은 준비되어 있었다. 다행히 그 답변이 면접관님 듣기에 나쁘지 않으셨는지 며칠 뒤 합격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면접용 답변 말고, '구질구질하고 지난한 과정'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사실 가장 솔직한 이야기는 어둑어둑한 싸구려 술집에 앉아 어묵탕에 소주를 두 병쯤 시킨 다음에나 풀 수 있겠으나, 코로나로 어려우니 이렇게라도 아쉬움을 달래 보자.




"이 회사가, 지금 하는 일이 최선일까?"라고 묻는 빈도가 잦아질수록, 이직 생각은 강해진다.


이전 회사는 내가 막 병원을 퇴사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를 때 기회를 준 회사였다. 당시에는 부딪히며 성장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조건 감사한 마음이 컸다. 실제로 입사해서도 어떤 일이든 주어지면 달려들어 정말 열심히 한 덕분에 이 회사에서 헬스케어 업계에 대한 경험을 쌓고, 내 경력으로는 접하기 힘든 다양한 마케팅 실무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입사 만 1년이 지난 시점부터 마케팅 업무 외적으로 잡다한 일을 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생겼다. 업무량도 과도했지만, 무엇보다 이 업무로 인해서 내가 성장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의 커리어를 쌓아간다기보다 '이 회사에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느끼며 "이 회사가, 지금 하는 일이 최선일까?"라고 생각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모든 게 애매했다. 회사의 성장 가능성, 그리고 회사에서의 나의 직무 포지션도. 


고민 끝에 나는 이 회사가, 지금 하는 일이 최선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직을 결심하게 된다.



마케팅 경력을 밀고 나갈 것이냐, 간호학 전공을 살릴 것이냐. 


이직 결심은 섰으니, 이제 방향을 정해야 할 차례였다. 마케팅 경력을 밀고 나갈 것이냐, 간호학 전공을 살릴 것이냐.


마케팅을 계속한다면 만 2년의 경력을 살려 이직할 수 있었다.(내 간호사 경력보다 길다!) 그동안 흥미를 가지고 했던 일이기에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회사를 옮기며 보다 체계적인 환경에서 일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나는 경쟁력 있는 경력 마케터가 아니었다. 관련 전공을 하지도 않았거니와, 2년 경력에 비해서 포트폴리오가 밀도 있지도 않았다. 이 시점에서 마케팅 커리어를 쌓으려면 대행사 또는 규모 있는 인하우스의 마케터로 이직해야 하는데, 내가 다른 경력자들을 제치고 자리를 꿰찰 수 있을까? 운 좋게 이직한다고 해도 조직에서 내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라고 대답하기에, 능력 있는 마케터들은 많고, 코로나로 인해 이직 문은 너무 좁았다. 


반대로, 간호학 경력을 살려 임상시험 업계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도 있었다. 이쪽으로 이직한다면 경쟁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간호학을 전공하고,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던 내 경력은 업계에서 선호하는 지원자에 가까웠다. 관련 교육을 들었던 이력도 있었고, 제약회사, 병원 관계자와 커뮤니케이션하고 협업하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였기에 이런 경험을 자소서나 면접에서 어필할 자신도 있었다.


다만,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취업 준비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고, 운 좋게 입사를 하게 되더라도 세 번째 신입 생활을 해야 했다. 임상시험 업계가 절대 녹록하지 않은 것을 잘 알기에 더욱 고민이 되기도 했다. (이미 이 고민은 3년 전부터 하고 있었고, 글도 썼었다. 관련 글: 익숙함에 속아 왜 탈간호했는지 잊지 말자)


이직 결심보다, '어디로' 이직하는지 결정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다. 그동안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을 막 퇴사하고 뭐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난 지난 시간동안 뭘 한 걸까? 자괴감이 컸다. 



새로운 직업 선택의 기준: 직무 전문성, 그리고 연봉


선택의 기로에 놓였고, 좋은 선택을 위해 기준이 필요했다. 이 시점에서 내 직업 선택의 기준은 무엇으로 삼아야 할까. 고심해서 직업 선택에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 가치를 꼽았다. '전문성', 그리고 '연봉'이었다. 


먼저, '전문성'

스타트업은 회사 특성상 한 명 당 업무의 커버리지가 넓은데, 우리 회사에 경우엔 마케팅 팀의 커버리지 영역이 특히 넓었다. 가끔은 본업은 못하고 잡다한 일들만 처리하다 퇴근할 때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침대에 누우면 '내가 오늘 회사에서 뭘 했더라?' 하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회사원이 딱딱 자기 일만 하고 살겠는가마는, 마케팅은 그 영역이 불분명한 만큼 다른 업무들이 밀고 들어오는 빈도수가 더 잦다고 느꼈다.(여기엔 우리 회사의 특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다.) 


여기에 비하면, 임상시험 업계는 업무 범위나 가이드가 훨씬 명확하다. 업계에서 'CRA'라고 소개하면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이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 예상할 수 있다는 것. 난 그게 너무 필요했다.


그리고, '연봉' 

임상 업계에서는 경력이 깡패라고 한다. 그만큼 임상시험을 진행하며 쌓인 개개인의 경험이나 노하우를 높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통상적으로 엔트리 레벨이 지나면 글로벌 CRO나 제약사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고, 이때부터 평균적인 연봉 상승률이 높은 편이다. 실제로 제약회사 내에서 비교했을 때도 임상 직군이 타 직군에 비해 연봉 수준이 높은 편인 것으로 나타난다.

출처: 메디파나뉴스, 제약업계 대졸사원 평균 연봉 4200만 원… 개발 직종 최고, 2020.02.28


그에 비해, 마케터는 연차에 따라 정해진 연봉 수준이 없이 갭이 천차만별이다. 대기업 또는 유니콘 스타트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면 좋겠지만, 그건 이미 내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가 마케터로서 커리어를 가져갔을 때와 CRA가 되었을 때 평균 연봉 상승률을 비교하면, CRA가 되었을 때의 평균적인 연봉 상승률이 더 높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전문성', '연봉' 두 가지 키워드를 놓고 보니, 답은 명확했다.

고민은 길었지만, 결심이 선 후에 이직 준비는 빠르게 진행됐다. 출퇴근과 함께 눈물 나는 이직 준비를 병행한 끝에, 올해 초 CRA로 세 번째 신입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마케터 커리어를 마무리하고, CRA로 세 번째 신입 생활을 시작하며 


병원을 그만두고 '나는 선배들과는 다른 길을 갈 거야!' 라며 탈간호, 탈임상 과정을 브런치에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3년 전이다. 그동안 나는 헬스케어 업계에 발을 디뎌 마케터가 되었고, 열심히 2년을 일하고 퇴사했다. 그리고, 올해 초부터 임상시험 업계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며 끊임없이 커리어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왔고, 그 과정을 글로 적었다. 브런치 시작할 때는 분명 병원 근처에는 얼씬도 않겠다고 호기롭게 글을 썼는데, 결국 임상시험 업계로 온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때의 나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고, 머쓱하기도 하다. 미안하지만 너의 미래는 이것이란다.


그래도, 나는 지금 이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믿는다. 지난 몇 년간의 방황도, 지난 두 개의 직장도 지금 결정을 내리기까지 꼭 필요한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미련이 없다.



브런치에는 일 년여 만에 새 글을 발행한다. 그동안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뭔가를 느낄 때마다 항상 글은 썼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온몸으로 태풍을 맞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 순간 쓰는 글이 지나치게 감정적이 될까 걱정이 됐다. 그렇게 글은 작가의 서랍에 미발행 상태로 저장되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난 지금, 이제야 태풍이 지나갔다고, 스스로 조금 단단해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제야 작가의 서랍에 쌓인 글 중 하나를 꺼내 과한 감정은 조금 털어내고, 매끄럽지 못했던 부분은 매만져 글을 발행해 본다. 


그리고, 새로운 회사에서는 '중중고 신입의 세 번째 신입 생활'을 주제로 글을 쓸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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