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임상 후 개발자로 진로 변경한 선생님들과 모임 후기
올해 초, 브런치를 통해 현직 개발자로 일하고 계신 (전)간호사 선생님의 메일을 받았다.
병원을 때려치우고, 국비과정 수료하여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국비과정으로 개발을 배우던 중 우연히 내 브런치 글에 공감하고, 희망을 얻었다고 하시며 가능하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는 항상 감격스러운 것이어서 나는 곧장 답변을 드렸고, 덕분에 몇 번의 반가운 메일이 오고 갔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일을 막 시작했던 시기에 내 브런치 글(면접, 그리고 병원 밖 세상으로)을 읽고 긴 댓글을 달아주셨던 또 다른 선생님이 생각났다.
간호사 면허 내다버리고 탈의료해서 개발하고 있는 간호사입니다.
본인을 '간호사 면허 내다버리고 탈의료 해서 개발을 하고 있다'라고 소개한 이분은 내 글을 읽고 '개발자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했던 모든 고민들이 이곳에 있다.'라고 하셨다. 탈간호인, 그것도 IT업계에서 일하는 전직 간호사를 만난 것에 격한 반가움을 표시하셨는데, 나도 다르지 않아 반가움에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었던 터였다.
프로 모임 크레이터인 나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신 두 분이 서로 만나시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흔하지 않은 길을 선택하신 두 분이 혹시 외롭지는 않을까 궁금했고, 무엇보다 나 또한 IT 업계 종사자로서 두 분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래서 두 분께 각각 자초지종을 설명드리고 혹시 함께 만나볼 의향이 있으신지 조심스레 여쭤봤다. 걱정한 시간이 무색하게도, 메일을 보내기 무섭게 두 분 모두 '당장 만나고 싶다'며, 초스피드로 답장을 보내왔다. (역시 개발자답다.)
그렇게 얼마 뒤, 전직 간호사인 개발자 두 명과 마케터 한 명이 역사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만나기로 약속했던 때가 하필 코로나19가 서울에서 활개를 칠 때라, 약속은 기약 없이 몇 주가 미뤄졌다. 다행히 만나고자하는 서로의 의지가 워낙 강력해 두 달 뒤에 드디어 첫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서울의 모 처에 모여 피자와 맥주를 먹고 마시며 서로의 신상을 오픈했다.
올해 초 메일을 주셨던 K선생님은 번역 서비스를 하는 회사에서 자연어 처리 엔지니어로, 댓글을 달아주셨던 O선생님은 헬스케어 IT 회사에서 백엔드 개발자로 일하시고 계신다고 했다.
두 분은 모두 국비교육 개발자 과정을 통해 개발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하셨다고. IT 국비지원 교육은 나도 고려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포기한 것이라 그 과정을 수료하고, 현업에서 일하고 계신 두 분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두 분에게도 개발자 교육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잘 맞는 부분도 있고, 흥미도 있어 무사히 교육을 마치고 취업도 하실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개발자가 되기로 결심하셨는지도 여쭤봤더니, O선생님께서 무려 파이썬 책을 읽다가 개발에 빠져드셨다고 한다(...) 그때는 개발이라는 신세계에 푹 빠져 책을 보고 손 코딩을 하며 연습할 정도였다고... 재밌는 것은 선생님은 그전까지 개발자에 대해서 생각도 해 본 적이 없고, 심지어 휴식 후 다시 병원에서 일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계셨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만나기 전까지 나도 궁금했다. 되짚어보면, 이 날 우리가 한 이야기는 대부분 업무의 고단함으로 귀결된다.
- 대체 프로젝트는 왜 이따구로 돌아가는 건가
- 일하면서 이럴 때 겁나 자괴감 느낀다
- 업무는 왜 해도 해도 끝이 없는가
- 때려치우고 다른 거 하자(IT 회사 직원들의 단골 멘트. 자매품으로 "우리끼리 앱 만들자"가 있다.)
- 그지 같은 건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병원은 돌아가지 않을 테다 등등.
각자의 회사 이야기, 직장에서의 애로사항을 이야기할 뿐인데 어찌나 빵빵 터지던지. 우리의 대화는 병원과 개발, 간호와 IT를 넘나들며 이어졌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고, 지금은 IT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만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사적인 이야기들이라 옮겨 적을 수 없는 게 아쉽다.
만족스러운 첫 모임 이후, 우리는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기로 했다. 알고 보니 셋 다 꽤나 애주가라는 공통점을 발견하여, 아마 모임이 좀 더 다이내믹 해 질 것 같다.
나는 선생님들을 만나고 다시 개발에 흥미가 생겼다. 두 분이 날 사이에 두고 '개발은 나의 자아를 표현하는 수단'이라며 눈을 빛내는데, 도대체 그 세계가 뭘까 궁금해진 탓이다.
같은 헬스케어 업계에서 일하고 계신 O선생님의 영향도 컸다. 선생님은 IT 헬스케어 분야에 간호사가 얼마나 필요한지 직접 느낀 바를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다. 본인이 "간호사 출신 개발자"로서 시야가 얼마나 넓어졌는지, 삶은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기회들을 잡을 수 있었는지를 듣고 있자니 거의 세바시 강연을 듣는 기분이었다. (장담컨대 O선생님 이야기 들으면 간호사들 다들 개발자 하겠다고 할 듯)
그래서 결국... 파이썬 책을 샀다. 당장 개발자가 될 마음은 없다만 IT 업계에서 일한다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브런치 키워드 유입을 보면, 생각보다 개발을 생각하는 간호사가 꽤 많다는 것을 느낀다. 나야 개발자가 아니라 할 말은 없다만, 간호사 출신 개발자 선생님들을 만나고 나니 혹시 고민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개발 공부하라고 떠밀고 싶어 졌다.
개발은 전공 불문하고 실력만 좋다면 그만큼 대접받는 몇 안 되는 직종이다. 게다가 경력이 쌓이면 간호사로서의 경험을 살려 일 할 수 있는 커리어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은 아직 포문이 열리지 않은, 발전 가능성이 높은 업계다. '간호사 출신 개발자'가 향후 몇십 년은 독보적인 커리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새로운 직종으로 진입하기 위해 면허를 포함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새로 쌓아 올려야 한다는 부담감은 극복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익숙하던 분야를 벗어나 새로운 커리어를 쌓는 것은 어디를 가나 고단한 일이다.
그러니... 개발 공부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선생님들 당장 개발 공부 시작하세요!
+) 글에서 소개한 O 선생님의 블로그를 함께 소개해드립니다.
개발자 출신 간호사 선생님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들러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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