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의 머그잔 이야기
나는 많은 장르의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 흔히 20세기 현대음악이라고 말하는 벨라 바르톡 류의 음악을 좋아합니다. “바다와 산, 동과 서, 산꼭대기와 계곡, 천당과 지옥이라고 한 지리적, 우주관적 Schema의 대립과 보완관계에 의해 전체의 통합을 이룬다.”라는 Claude L. Strauss의 구조분석을 실제의 음악에 옮긴 대 작곡가, 예측할 수 없는 음계와 리듬, 우리의 모든 환경 속에 적용되는 황금분할, 이 모든 것을 바르톡의 음악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음악을 감상할 때는 바르톡 특유의 온음계와 반음계를 하나의 체인으로 묶어버린 이해할 수 없는 음계의 구성으로 특별히 시간을 내어 음악을 분석하기 전에는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든 음악이지만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한다.’라는 나의 신조에 의지하면서 바르톡의 상상키 어려운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하게 됩니다. 특히 ‘현악기,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을 감상할 때는 너무나 부드러우면서도 완벽한 현악기의 선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깊은 감명에 빠지고 맙니다.
그렇지만 나의 친구는 이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바르톡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선율은 아름다워 따라 부르고 싶은데 너무 난해하고 예측불가라며 나와 같이 음악에 대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 들어야 할 음악이란다. 그래서 싫다고 합니다. 나처럼 감상을 머리로 하지 말고 가슴으로 한다면 모를까, 그 친구는 늘 머리로 음악을 들으려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합니다. “음악에 대한 상식을 갖는 것과 음악을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즉 음악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 음악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주위에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그들이 처한 환경 속에서 그들의 생활공간을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성별, 나이별, 지역별, 세대별로 구분되는 공간 속에는 그들만의 다양한 문화와 상황에 맞는 음악장르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들로 그들의 음악의 기호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장르가 아니면 무시하거나 관심을 덜 보이는 예가 많고 그 음악이 아니면 그들에게 서로 인정이 안 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현상을 우리가 음악을 이해하는데 가슴이 아닌 머리로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이 듭니다. 즉 음악을 특정한 방법으로 이해하는 데만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서양음악이 들어 오면서 화음이 이렇고 음계가 이렇고 하는 이론과 실제를 통하여 음악에 접근을 해서 그런가? 기쁜 일이 생기면 스스로 흥에 겨워 덩실 덩실 춤을 추고 노래하며, 슬플 때는 혼자 콧소리로 중얼거리며 먼산을 바라보며 가슴 깊이 그 순간을 느끼는 자체가 너무 좋았는데…..
우리는 음악을 안다, 좋아한다, 이해한다 등으로 음악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할 때 표현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가 아는 음악을 모두다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꼭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어떠한 종류의 음악이든 간에, 여러분들이 음악을 들을 때의 느낌이 매우 귀중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학교 교육을 통해 일방적으로 강요된 음악의 법칙을 따질 것이 아니라 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자는 얘기입니다.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조건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금방 한계가 도달하겠지만 느낌으로 이해한다면 현실의 스토리를 공상과학 소설로 펼쳐놓는 것처럼 이해의 스토리가 무한정 펼쳐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음악의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