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위헌

by 임복경

갑작스러운 팔급의 등장에 시진이 당황하여 입술을 핥느라 검은 구멍으로 혀가 널름거렸다. 시진에게 다가가다 팔급이 형틀에 묶인 궁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변방으로 떠나기 전까지 지척에서 팔급의 시중을 들던 궁인이었다. 눈앞에 벌어진 참상에 놀라 팔급이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시진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측근 청안이 궁인들에게 빠른 손짓을 했다. 궁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소리 없이 움직여 주변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모두 총총히 뒷걸음으로 사라졌다. 시진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죄를 지은 자에게 응당한 벌.”

시진은 제대로 발음할 수 없음에 말을 짧게 내뱉었다.

“저 궁녀는 본가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사람입니다. 내가 없는 마당에 나를 따르던 이를 어찌 저리 함부로 합니까?”

처소 안으로 발길을 돌리던 시진이 홱 돌아서서 팔급을 노려보았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이 내 것이오. 내게 시비를 가리자는 거요?”

팔급이 시진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체념하듯 말을 돌렸다.

“어머님께서 편치 않으시다 해서 잠시 돌아온 것이오. 본가에는 나 혼자 가서 뵙고 다시 돌아가겠소.”

시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팔급이 몸을 돌려 가버렸다. 삼 년여 만에 나타나 시진의 처소에 아니 그들의 보금자리에 들지 않고 그깟 궁녀를 빌미로 자신을 책망하다 갔다. 다시 변방으로 돌아가다니, 언제 올지 기약 없이 가다니. 시진은 화병 조각을 삼키던 궁녀를 표범의 먹이로 던져주라고 명하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어쩔 바를 몰라 같은 자리를 오락가락했다.

사촌 위헌이 화란궁에 들어서다 시진을 발견하자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청안이 궁녀들과 조용히 자리를 물러났다.

“여어, 우리 왕녀님. 나와 계시는구려. 꽃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따라왔더니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지 뭡니까?” 양손에 들었던 보라색 등나무꽃을 한 아름 합하여 시진의 품에 안겼다. 시진의 치뜬 눈이 슬며시 내려왔다. 위헌이 꽃에 묻힌 시진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태양이 구름을 물리쳐야 천하를 밝힐 것 아니오. 왕녀가 시름에 빠지면 온 세상이 어두워진단 말이지. 오늘같이 좋은 봄날, 사냥이나 가십시다.”

시진의 어머니에게 쌍둥이처럼 닮은 손위 자매 있었다. 그 유일한 아들인 위헌은 자신의 어머니를 꼭 닮았다. 시진의 어머니를 닮은 셈이었다. 시진의 어머니는 시진이 가례를 올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시진의 아버지인 관무제가 평나라를 제패했을 당시 평 나라 공주였던 어머니는 사후에 평무후라는 칭호를 받았다. 평나라 출신 관무제의 왕후란 뜻이었다. 어머니는 유일한 혈육인 언니를 궁 가까이 살게 하고 자주 왕래하게 했다. 나라가 존속했다면 제후가 되었을 언니가 고 나라 장수와 혼인하여 범인으로 살았다. 평무후는 언니 전 씨 부인을 측은하게 여겼다. 시진과 위헌은 어머니들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만난 사이였다. 위헌이 두 달 먼저 태어났다. 어려서 위헌은 전 씨 부인을 따라다녔고 궁에 살다시피 했다. 위헌은 시진이 얼굴을 가리지 않았을 때부터 보았던 것이었다. 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유일한 평 나라 출신 귀족이기도 했다.


시진이 일곱 살 무렵이었다. 등에 쏟아지는 가을 햇볕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시진 공주가 궁궐 뒤편에 자리한 연못가에 바짝바짝 무릎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연못에 비친 얼굴은 거울만큼 맑지 않아서 얼핏 보면 갈라진 입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시진은 입에 난 구멍이 갑자기 제대로 붙었을 리 없지만 혹여나 하는 마음에 물가로 다가갔다.

저러다 연못에 빠질까 무서워 뒤에 몇 걸음 떨어져 있던 궁녀들이 속도 모르고 황급히 달려와 연못에 자기들 얼굴을 드리웠다.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던 시진이 뒤돌아 땅바닥에 뒹구는 돌을 양손에 잡히는 대로 움켜쥐고 방해하는 이들에게 던졌다. 궁인들은 돌을 피해 물러섰지만 멀리 가지 못했다. 시진이 다시 돌아앉아 기대에 차서 연못에 비친 입을 뚫어져라 보았다. 영락없는 언청이 모습이었다. 손가락을 세워 윗입술에 난 구멍을 두 개로 막아보고 세 개로도 막아보았다.

저만치서 위헌이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시진 공주, 우리 함께 무슨 놀이할까요?”

위헌이 가까이 다가서자 시진이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행동에 위헌이 일순간 멈칫하다 시진의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부끄러운 곳은 가려야 해요, 여기처럼.” 위헌이 엉덩이를 돌려 가리켰다.

“공주의 입은 부끄러운 곳이 아니에요.” 위헌은 엉덩이를 가리고 뱅뱅 돌면서 이리저리 우스꽝스럽게 뛰어다녀 시진을 웃게 했다.


그 후로도 시진이 가리개를 하고 나타나면 위헌이 걷어주곤 했다.

“나는 공주가 편하길 바라요. 이런 가리개는 공주를 모르는 사람 앞에서나 쓰세요. 나는 이미 공주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공주의 입은 공주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표식이에요.”


철이 들고부터 시진은 아침에 눈을 뜨면 알 수 없는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올랐고 온전한 입들을 보면 모두 찢어버리고 싶은 욕구로 몸을 떨었다. 그럴 때마다 유리로 된 예쁜 것들을 깼다. 유리는 고와서 좋았고 잘 깨져서 더 좋았다. 위헌의 입만 빼고 다 찢거나 부숴버리고 싶었다. 위헌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만이 새지 않고 온전해도 거슬리지 않았다.

위헌은 세상에서 시진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위헌은 시진이 어떤 포악한 일을 저질러도 눈감아 주었고 무엇을 하든 탓하지 않았다. 시진은 믿었다. 어머니를 닮은 위헌은 어머니의 마음을 가졌다고. 시진은 자신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위헌을 위해서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늘과 땅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시진이 가례일 전날 밤, 달빛 아래에서 어머니 생각에 젖어있을 때 위헌이 찾아왔었다. 호탕한 위헌이 그날 밤엔 유난히 말이 없었다. 나란히 서서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다 위헌이 시진의 등 뒤로 갔다. 그녀의 등에 위헌이 손가락으로 크게 새기듯이 썼다. 한 글자였다.

‘慕(사모할 모)’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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