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팔급

by 임복경


팔급은 어머니 제강부인의 병이 날로 깊어져 집에 머물러있었다. 고 나라 위로 동호와 산융이라는 부족이 흉노에 밀려 내려오는 통에 침략과 약탈이 날로 심해졌다. 이에 팔급은 장성을 더 높게 쌓으라고 명하고 온 참이라 그의 마음은 북방의 처례성에 가 있었다.


전쟁에 임할 때면 그는 병사들을 잃지 않기 위해 주도면밀했다. 전차에 탄 장수를 항상 앞장서 전투에 나가게 하였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선두에서 지휘했다. 몇 개월 전, 철옹 같은 처례성에 막히자 산융의 무리가 북동쪽 계곡으로 침략해 왔을 때였다. 기별을 받고 팔급이 군사를 몰고 계곡으로 갔다. 한 발만 밀리면 고을에 닿을 터라 계곡에서 적을 만난 팔급은 물러설 수 없었다. 적군의 처지도 같았다. 좁은 계곡에서 후퇴란 자기편을 밟고 가야 하는 형국이었다.


팔급이 탄 말이 적의 표적이 되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팔급이 말에서 떨어진 채 도끼 모양의 큰 칼을 휘둘러 적들의 목을 벴다. 적군과 아군이 뒤엉켰다. 창과 방패가 부딪히는 소리, 병사들의 함성과 신음 소리가 계곡을 메웠다. 고 나라의 청동으로 된 창과 칼은 적의 철로 만든 갑옷을 뚫지 못하고 휘거나 부러지고 말았다.

어느새 강철 칼에 쫓겨 고 나라 군사가 마을까지 밀렸다. 피비린내에 놀란 고 나라 양민이 혼비백산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계곡을 통과해서 마을에 쳐들어온 적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고 나라의 병사들이 철보다 무른 청동을 휘둘러 이길 방법이란 적들의 목을 노려 숨통을 끊는 것뿐이었다. 청동 창검은 철갑을 당해낼 수 없었다. 적장의 목을 창끝에 매달아 적의 사기를 꺾는 것도 하나의 수였다. 이미 계곡물은 적과 아군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때, 용이 그려진 투구가 팔급의 눈에 들어왔다. 적장이었다. 가로막는 적군들을 쓰러뜨리고 드디어 놈과 마주 섰다. 놈의 칼은 비길 데 없이 길었다. 시커먼 칼등에 칼날에선 핏물이 뚝뚝 떨어졌고 그 사이로 날카로움이 얼음 빛으로 번뜩였다.

“허이얏”

팔급이 달려가 날아올라 투구를 내리쳤다. 섬광 같은 몸짓으로 적장의 목을 감싼 투구를 날렸다.

‘턱’

투구가 날아가 땅에 떨어지고 적장이 뒷걸음질 치다 주저앉았다. 팔급이 뒤돌아 공격을 이어가려다 흠칫 놀라 다시 보았다. 여자였다. 필급이 주저하는 사이 적장이 칼을 고쳐 잡고 덤벼들었다.

“이야압”

심장을 노리고 달려든 적장의 칼끝이 팔급의 배를 지나갔다. 팔급의 짧은 도끼 칼은 적장의 칼에 무력했다. 마지막 힘을 다해 팔급이 팔을 뒤로 크게 뻗었다가 돌진해 오는 적장에게 칼을 날렸다.

‘털썩’

날아든 도끼 칼을 어깨에 맞고 적장이 쓰러졌다. 팔급이 피를 흘리는 것을 알아채고 주변에 장수와 병사들이 몰려와 피신케 했다. 적들도 적장을 둘러싸고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물러서지 마라. 여기는 이제 우리 땅이다, 그 증표로 이곳에 나를 묻어라.”

적장이 명하고 스스로 목을 벴다.


산융 부족의 침입으로 마을 하나를 내주었지만 뜻하지 않은 소득도 있었다. 빼앗은 무기를 본을 떠 고 나라도 철로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다. 산융이 가진 칼과 창은 단단한 철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고 나라의 청동 무기는 주석이 귀해서 대량으로 제조하기도 어려웠는데 철광석은 어디에든 있어 철기를 만들어내는데 오히려 값도 덜 들었다.


산융과의 전투 후에 팔급이 궐에 들어가, 고 나라 왕에게 청을 올려 산간에 널려 있는 철광석으로 무기를 양산할 권한을 부여 받았다. 곧바로 검은 철광석을 전국에서 모아들였다. 채굴된 검은 광석을 모아 철을 만드느라 병공소의 규모와 수가 점점 늘어났다. 광석을 녹이는 용광로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고 너울대는 불꽃이 매일 팔급의 눈에서 이글이글했다.


도성에 머무는 동안 팔급은 화란궁에 들지 않았고 일을 마치면 어머니 곁으로 갔다. 나랏일로 분주하고 병든 노모의 임종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혼인한 이후 팔급과 시진은 서로 기대를 품은 시선을 느꼈지만 외면했다. 두 사람의 기대는 후사가 있어야 한다는 나라의 기대이기도 했다. 팔급이 시진의 바람 앞에서 머뭇거려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던 기대가 거대한 희망이 되어버렸다. 혼인하던 날 넘었어야 하는 문턱이 이제는 성벽이 되어 두 사람 앞에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었다. 팔급은 성벽을 바라보며 더 멀리에 더 견고한 자신만의 장벽을 지어 올렸다. 마치 언젠가는 시진이 공격해 올 거라는 징조를 알아본 사람처럼. 숨어야 할 진지가 필요한 적수처럼.


며칠 후, 장마가 시작해 강물이 불어나 농토와 가옥들이 물에 잠겼다. 비바람을 맞으며 쑥대밭이 된 집 안팎을 추스르느라 팔급과 여동생 거립이 지쳐 몸을 가누기 힘든 날이었다. 팔급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머니에게 들렀다. 병석에 누운 지 어언 한 해가 지나 기력이 쇠한 어머니가 앙상한 팔을 내밀어 팔급의 손을 잡았다.

“네가 열여섯 되던 해에 시루를 깨지 못하게 했어야 하나, 시루가 깨지지 않아 부러 네가 발로 깰 때, 그때라도 말렸어야 하나… 이제 와 후회가 드는구나. 세상이 어지러우면 온갖 잡신의 소리를 세상에 전하려 드는 이들이 판치는 것을 그 당시엔 한심하다 여겼는데 말이다. 죽을 때가 되어 내가 마음이 약해졌나 보다. 아들아….”

“네 어머니, 부질없는 걱정하지 마시고 기운을 차리세요. 무녀의 말을 따르지 않아 제가 공주를 아내로 맞았다니요… 저는 가문을 위해서나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 공주를 택한 것입니다.”

“네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그렇다면 네가 너 자신을 보듯 공주를 대하거라. 미워도 하겠지만 아끼고 품거라. 버리려 들면 내가 나를 떨쳐버릴 수 없듯이 고통스러울 뿐이다. 공주가 너의 마음을 얻지 못해 자신이 가진 것을 부질없다 여기지 않도록 해라. 너의 큰 마음으로 공주의 뻥 뚫린 문을 막아주어야 한다. 그 검은 문을….”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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