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구였던 고나라 왕이 밤낮없이 물을 찾고 소변이 잦아 잠을 설친 지 오래였다. 급기야 눈이 어두워져 정전에 나오는 날이 줄어들고 대신들이 국사를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왕은 종기로 온몸이 뒤덮인 데다 뼈만 앙상해졌고 죽기 직전에는 정신이 혼미해져 왕녀 시진과 손자 여담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고나라의 왕 관무가 오십의 나이에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아들은 병석에 누워만 살다 몇 해 먼저 세상을 떴다. 패권국 고 나라의 왕으로서 자신을 황제라 칭하려던 고관무가 언제 깨질지 모르는 동맹국들로 둘러싸인 나라를 왕녀에게 물려주었다.
고 나라 서북쪽 평원에 석죽호라는 염호가 있었다. 석죽색(엷은 분홍빛) 호수였고 그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어 강처럼 보였다. 옆으로 암염 층으로 이루어진 산들이 병풍처럼 솟아있었고 산봉우리 끝에는 깊은 동굴이 있었다. 그 안에 황제의 석관이 놓였다.
관은 백운석이라는 흰 돌로 만들어졌다. 틀만 있는 형태라 안에 누워있는 어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시신은 세월을 타고 허공에 흩어질 육신이기에 무명으로 간소한 형태의 심의(웃옷)와 고(바지)만 입혔다. 왕이 아끼던 칠현금이나 그림들을 비롯한 검, 말 등을 구리로 제작하여 석관 주위에 세워 묘실이 채워졌다. 소금기 가득한 동굴 안 높은 곳에, 구리와 광물로 만든 애호하던 물건들에 둘러싸여서 망자는 썩지 않았다. 세상에서 살았던 만큼 세월이 지나면 시신은 먼지가 되어 흔적 없이 날아갈 것이었다. 고 나라인은 그렇게 죽어서 썩지 않았다. 고 나라 사람들에게 죽음은 단지 죽은 자의 영혼과 육신이 산 자의 눈앞에서 없어지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장례란 그저 사자가 지상에서 사라지게 돕는 것이었다.
시진이 아버지를 뒤로하고 동굴 앞에 서서 패랭이꽃 빛이 감도는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고역스럽던 아버지의 피고름 냄새가 없는 저 아래 세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왕은 고통이 사라진 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나 평온해 그 옆에 나란히 눕고 싶은 유혹마저 들었다. 그러나 어느 결에 다가선 아들이 시진의 손을 잡았고 여왕은 미혹을 떨치고 궁으로 돌아왔다.
이른 아침 여왕이 대신들과 조정 회의를 하러 나서기 전이었다. 일곱 살 왕자 여담이 내전으로 건너왔다.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냐?”
어린 왕자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단 위 어좌에 앉은 어머니를 한 번 보더니 시선을 떨구었다. 여왕이 아들의 갸름한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행령께서 드셨습니다.” 문밖에서 궁인이 알려왔다.
외교 직무를 맡고 있는 위헌이 들어왔다. 국상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위헌은 위로차 시진을 자주 찾아왔다.
“우리 왕자께서도 와 계셨군요. 오늘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반가운 위헌의 인사에도 여느 때와 달리 왕자의 얼굴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저는 좋습니다. 행령 대인께서도 안녕하신지요.”
위헌이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하고서 하려던 말을 삼켰다.
“할 말을 어서 하라. 정전에 들 시간이다.” 시진이 재촉했다.
시진을 빼닮은 왕자가 미간에 힘을 주자 눈꼬리가 치올랐다.
“내일 아버님께서 처례성으로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저도 그곳에 가보고 싶습니다.”
왕자의 말에 당황한 것은 시진만이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왕자를 찾아와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위헌도 놀라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시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된다. 위험한 곳이야. 게다가 네가 따라가면 부군의 일을 훼방하는 것이다.”
시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아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지금은 변방의 국경이 날마다 바뀌는 형국이니 안정된 시국이 오고 왕자께서도 장성한 후에 행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헌이 안타까운 마음에 여담을 달랬다.
“그것이 언제쯤입니까?”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왕자가 위헌의 말을 잘랐다.
“네가 그렇게 울음으로 사정하지 않을 때다. 그 눈물이 아직 어린애란 증거다.”
어머니의 화난 어조에 여담이 얼른 양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림 장군이십니다.” 궁인이 아뢰었다.
여담과 위헌이 일어서 팔급을 맞이하였다. 팔급이 왕자의 앞쪽에 앉았다.
“즉위식이 있은 지 석 달이 지나 이젠 조정이 안정을 찾았으니 안심하고 저는 소임을 다하러 떠날까 합니다.”
여왕이 서늘한 눈빛으로 팔급을 쏘아보며 한마디 내뱉었다.
“그러세요.”
팔급이 신하로서 충성을 다짐하는 말을 간단히 남기고 내전에서 물러 나왔다.
“아버님, 아버님!”
태자가 양팔을 휘저으며 달려왔다. 뒤로는 시종 십여 명이 허리를 굽힌 채 허둥지둥 따랐다. 팔급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왕자를 기다렸다.
“어찌 그리 불러대느냐, 궁의 예법이 엄연한데….”
“예하… 이번에는 어머니의 허락이 없어 예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다음번엔 꼭 함께 가겠습니다.”
“왕자는 천자가 될 몸이다. 하늘의 아들이란 뜻이지. 하늘이 움직이는 법은 없다. 아비가 해가 되어 오갈 것이다. 저 해를 보아라.”
팔급이 팔을 들어 동쪽에 떠 있는 해를 가리켜 서쪽 하늘로 크게 호를 그렸다가 다시 동편의 해 쪽으로 한 번 더 그렸다.
“알아들었느냐?”
왕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팔급이 지체 없이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디선가 뻐꾸기가 울었다. 내전에도 새소리만 울렸다. 아비를 쫓아 황급히 뛰쳐나간 왕자의 빈자리를 사이에 두고 시진과 위헌,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