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나라와 국경을 나란히 하고 있던 해 나라 세자의 혼례가 있던 때였다. 세자의 가례는 해와 노 두 나라가, 강국이던 고 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혼인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노 나라는 서역과 닿아있어 교역이 활발한 부국이었고 해 나라는 고 나라와 인접한 덕에 철기를 받아들여 무력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영토를 합하면 고 나라보다 컸고 이는 주변국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정세였다.
여봐란듯이 해 나라의 왕이 각국의 왕손들을 초청하였다. 축하 사절단으로 왕손의 참석을 요구한 것은 명목상으로는 대대손손 이어질 우호 관계를 다지는 계기를 갖자는 것이었으나 숨은 뜻은 해 나라의 세력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고 나라에서도 시진 왕녀가 사절단을 이끌고 해 나라에 도착했다. 왕녀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병약한 동생을 대신해서 태사의 무리와 함께하였다. 해의 왕자는 열일곱 나이였으며 호전적이고 여색을 탐하기로 유명하였다. 가례 끝에 친선 행사가 있어 왕손을 포함한 나라 간 격구 대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해 나라 왕자가 격구를 즐긴다는 소문이 있었다. 출전 공자는 미혼으로 규정되었기에 시진 왕녀는 부러 태사의 사자들과 동행하였다.
격구란 각 10인의 두 편이 말을 타고 장시(긴 막대기)로 목구(나무공)를 쳐서 10보 폭 양쪽깃대 사이에 넣는 겨루기였다. 승자는 3점을 먼저 내거나 상대편에 남은 기수를 떨어뜨려 3인 이하로 만들면 되었다. 말을 타고 평원을 누비며 어른 주먹만 한 공을 치느라 부상자가 속출하고 운이 없으면 죽는 일도 빈번했다.
고와 해 두 나라가 종전(마지막 겨루기)에 이르렀다. 해의 왕자는 개인 무사단을 꾸리고 있었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더구나 해는 산악 지형을 기반으로 북쪽으로 치우쳐 있어 사람들의 체형이 크고 성품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해의 무사들과 격구를 치른 기수들은 바람에 낙엽처럼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사실 고 나라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주변국 무사들은 격구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사자들에게 격구는 수련 과목이었으므로 어쩌면 해의 왕자는 애당초 고 나라에게 도전장을 내민 셈인지도 몰랐다.
드디어 고와 해 양국의 왕손들이 종전에 나섰다. 말고삐를 거머쥔 시진의 입꼬리 한쪽이 실룩였다. 해의 왕자는 장시를 공에만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끝에 걸리는 사람이나 말을 가차 없이 쳐냈다. 특히 보호구로 다 가려지지 않은 기수들의 안면부를 노렸다. 그리고 말의 다리를. 그의 무자비함이 오히려 시진을 자극했다. 시진도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양국의 왕자와 왕녀가 무아지경에 빠져 공보다 기수들을 몰고 다니기에 이르렀다. 기수들은 두 사람을 피해 공을 몰아 어떻게든 3점을 먼저 내려 필사적이었다.
양편이 2점씩 득점하였고 해의 기수가 5명, 고의 기수가 4명 남았다. 고에 남은 4인은 시진, 위헌, 팔급 그리고 청안이었다. 시진을 가까이에서 보호하던 위헌에게 해의 왕자가 목구를 쳐서 날리고 뒤이어 달려왔다. 붉은 공이 위헌이 탄 말의 옆구리를 때렸고 말과 위헌이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왕자는 장시를 쳐들고 쓰러진 위헌에게 달려왔고 시진은 그를 막으려 달렸다. 그가 탄 말의 발굽 아래 위헌이 짓이겨지기 직전이었다. 왕자의 바로 뒤를 쫓아오는 이가 또 있었으니 바로 팔급이었다. 남은 기수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목구가 해 나라 구문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발 차이로 왕자를 앞선 팔급이 공을 쳐서 구문으로 넣었고, 그 사이 청안이 옆쪽에서 말을 달려와 위헌을 일으켜 등 뒤에 태웠다. 승패가 갈려 겨루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나발이 울리는 순간에도 장시를 쳐들고 마주 달리던 양편의 왕손이 멈추지 않았다. 구장에 모인 수천의 사람들이 놀라 숨을 죽였고 날아가던 새도 멈추었다.
말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해의 왕자와 시진은 멈추려 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말이 서로의 코앞에서 멈췄다. 해의 왕자가 공중으로 부웅 날아올랐다. 고삐를 팔에 둘둘 말고 갈기까지 거머쥔 시진이 장시를 휘둘렀으나 왕자를 놓치고 허공만 갈랐다. 시진의 장시를 피한 해의 왕자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수들이 시진을 에워쌌다. 그제야 왕녀가 말 위에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고 나라의 승이었다.
귀경길 내내 위헌은 가마에 누워 실려 왔다.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구석이 없었다. 오른쪽 어깨와 허리에 부목을 대고 통증을 줄이느라 전신에 약초와 황토를 붙여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부상을 입은 후 며칠은 고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헛소리까지 했다. 이레면 도착할 길을 병자를 옮기느라 속도를 내지 못해 보름 넘게 걸렸다.
왕녀는 겨루기에서 공을 세운 태사자들을 치하하였고 그중에서도 어려운 태세를 뒤집고 승점을 낸 팔급의 공을 칭찬하였다. 환궁 길에 왕녀는 팔급에게 가까이에서 자신의 뒤를 따르라 명하였다. 험준한 산길에 접어든 어느 날, 앞서가던 왕녀가 뒤처진 무사들을 돌아보았다. 묵묵히 따르는 팔급을 왕녀가 잠시 바라보다 다시 말을 몰았다.
“나는 나를 보지 않고 나라를 바라보는 자를 찾고 있다.”
“충심이 있는 자를 말씀하십니까?”
“나를 나라로 여기는 자다.”
“큰 포부를 가진 자가 나라를 세울 수 있다 하였고 대장부는 큰 뜻을 펼치는 군주를 따르는 법입니다.”
왕녀가 뒤돌아보니 팔급이 머리를 깊이 숙였다. 팔급의 넓은 어깨가 산 아래 길을 가리고 있었다.
“해, 노, 동, 강, 제, 춘… 세상을 내 발아래 둘 것이다. 그 세상의 반은 너의 것이다.”
참을성 없는 왕녀가 이번 길은 앞서가 먼저 귀경하지 않았다. 그 일을 두고 동행한 이들이 수군거리기를 아픈 사촌을 돌보는 마음이라고 했다. 왕녀가 잔악하기만 한 건 아니라고도 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그녀의 뒤를 바짝 따랐던 팔급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