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관찰기 3편
우리나라의 회사라는 공간에는 일종의 사회악처럼 그려지지는 존재가 있다. 바로,‘꼰대’. 그들은 종종 위계화된 질서를 만들어 내고, 불합리한 의사 결정과 의사소통의 동맥경화를 일으키며 회사라는 거인을 난폭하게 만드는 주요한 인자로 취급받는다. 팀장이라는 직책을 경험해보기 전인 30대 초반에는 쓴 칼럼에서는 꼰대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었다. “꼰대라는 게 별 게 아니다. 자기 말만 맞고, 자기 말만 옳다고 우기면 그때부터 꼰대가 된다. 그러니 꼰대는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애티튜드의 문제다.”라고.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렇게 단편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왜냐하면 꼰대들 또한 ‘공감’과 ‘소통’의 시대에 걸맞게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해서 그런 ‘우격다짐’의 성향만으로 ‘꼰대’라고 낙인찍기에는 좀 섵부르다. 자기들이 ‘꼰대’인데도 스스로는 ‘멘토’라고 착각하는 이들도 허다하다. 아니 그런 ‘꼰대 2.0’은 그래서 더 위험하다.
꼰대의 스테레오 타입은 이렇다.
‘왕년의 성공담을 늘어놓고, 다른 사람들의 얘기는 잘 듣지도 않으면서,
자기만 옳다고 주야장천 늘어놓는 중년의 남성’
이 대척점으로 한동안 떠오른 게 바로 ‘멘토’다. 주관적이긴 하지만, 멘토는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권위를 이루고, 지도와 조언을 해주면서 이끌어주는 어른’의 이미지이다. 문제는 그 경계가 무척 모호하다는 거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처럼 “내가 하면 멘토링, 남이 하면 꼰대질”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가끔 후배들의 상담을 해주다가도 내가 하는 게 '멘토링'인지 '꼰대질'인지 스스로도 헷갈릴 떄가 있다. 게다가 또 꼰대라는 게 딱히 성별의 문제도 아니고 나이의 문제도 아니라 여성 꼰대, 젊은 꼰대들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얼 꼰대의 ‘속성’으로 봐야 할까.
흔히들 첫번째로 꼽는게, ‘공감’과 ‘소통’의 포인트가 있느냐 없느냐에서 꼰대와 멘토의 차이가 생겨난다고 한다.
“요즘 어린것들은… “,
“내가 너만 할 때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
꼰대의 3단 콤보 어법으로 손꼽히는 말들.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에는 저런 말을 하는 꼰대는 정작 찾아보기 힘들다. 자기들도 저런 말하면 구태의연하고 촌스러워 보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렇게 대놓고 얘기하는 이들에게선 어딘가 모르게 귀여운(?) 면이라도 있다. “그래, 당신이 나를 꼰대로 생각하든 말든, 내가 할 얘기는 해야겠소!”라는 그 정공법의 대담함과 결연함은 왠지 모를 향수(?)를 느끼게 할 정도다. 사실 그들은 그냥 조금 타인의 감정에 대해 섬세하지 못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것뿐이다. 공감대의 부족은 꼰대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반면 진화한 꼰대들의 어법은 의외로 ‘민주적’(?)이며 공감의 표피를 덧대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의 어법은 “미안하긴 한데… 하지만…”과 같은 ‘조건형 사과’로 변한다. 그들은 “상황은 잘 알겠지만… ”, “당신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이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한다. 그들은 ‘공감과 소통’의 코스프레를 하고 싶긴 해도, 실제로 민주적인 의사 결정할 생각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잔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대부분 ‘옳은 말’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맞는 말이라서 어떻게 반박하기도 힘든, 그저 속으로 ‘자기도 그렇게 안 하면서…’라고 구시렁댈 수는 있어도 그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말들. 스스로가 꼬장꼬장하게 그것들을 다 지키는 사람이라면 사실 꼰대가 아니라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터이고, 심지어 그런 잔소리를 하는 이가 정작 자신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손 치더라도 잔소리의 내용 자체는 곰곰이 듣다 보면 쓸 말이 많은 게 사실이다. 이들은 다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해서 누군가를 설득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단순히 잔소리가 많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꼰대로 단정 짓는 것 또한 조금은 성급한 판단이다.
서로의 의견이 충돌을 일으킬 때 나이, 직급의 권위를 내세워서 마무리하는 이들. 이들은 물론 꼰대의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에도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적극적 꼰대’와 다른 곳에서 그 권위를 끌어오는 ‘수동적 꼰대’로 나뉜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건 ‘수동적 꼰대’들이고, 이들은 자신들이 꼰대라는 자각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적극적 꼰대’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다.)
이런 유형은 중간관리자급에서 특히 많다. 부하직원들과의 회의에서는 실컷 의견을 나누고 나서도 정작 상사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다가 와선 “에휴… 부장님이 저러시는데 어쩌겠니…”라며 오히려 하소연만 하는 스타일이다. 자신이나 부하직원들의 의견을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의지보다는 그냥 상사의 권위를 우선하는 이들이다. “조직이 그런 걸 어쩌겠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그런 조직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유지한다는 생각은 못한다. 그들은 적극적 꼰대 유형과 공생하며 스스로 책임지지 않고자 하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유형의 ‘꼰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적극적 꼰대’ 유형은 죄다 진짜 ‘꼰대’인 걸까? 공감의 부족, 과도한 잔소리, 권위적 태도 등등 이 모든 요소들은 어떻게 보면 꼰대의 부수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 이런 상사가 있다고 하자. 부하직원들에게 매일 “요즘 젊은 애들은 근성이 없어. 그거 내가 해봐서 아는데 말이야. 너는 이걸 잘못했고 저걸 잘못했어. 야, 까라면 까”라고 하는 상사. 딱 봐도 ‘꼰대’스럽다. 앞에서 말한 ‘적극적 꼰대’ 유형이다. 그러나 정작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제가 잘못 디렉팅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 책임입니다.”라고.
개인적으로는 이런 이들은 회식자리에서 술에 취해서 “내가 왕년에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을 혼자서 4시간을 떠든다고 해도, 꼰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아, 물론 그렇다고 같이 술을 먹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다;;) 진짜 꼰대들은 저런 순간에, 이렇게 말한다. “이봐, 김대리. 이건 그때 나한테 컨펌 안 받은 내용 아냐?” 그렇다. 진짜 꼰대들은 책임의 순간이 닥치면 자기가 해왔던 말들을 쏙 집어넣는다. 그리고 마치 그게 타인의 잘못인 것처럼 발을 뺀다.
그렇다. 진짜 꼰대의 핵심은 ‘비겁함’이다.
애석하게도 ‘꼰대’라는 단어는 오해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권위적인 태도, 공감의 부족, 잔소리 등등의 ‘꼰대스러움’은 사실 꼰대의 본질과 크게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꼰대’가 기피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권위적이어서가 아니라 권위는 내세우면서 책임지지 않으려 해서이다. 잔소리만 하면서 책임지지 않으려 해서이고, 자신들이 만든 상황으로 인해 피해받는 이들에 대해 공감 능력도 없으면서 책임조차 지지 않으려 해서이다.
‘비겁한 어른들의 보편화’가 ‘어른 세대’의 권위를 바닥에 떨어트려버렸고 그래서 때론 연륜에서 묻어난 바람직한 쓴소리를 하는 이들조차 ‘꼰대’라고 욕먹게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어른들을 보면서 자라난 아이들(부하 직원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젊은 꼰대가 되어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꼰대들의 세상이, 꼰대들이 군림하는 회사가 꼴 보기 싫다면, 우리의 모토는 ‘비겁해지지 말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한 문장이 우리가 꼰대가 되는 걸 막아줄 마법의 묘약이다. 어쩌다 실수를 할 수는 있다. 가끔은 자기 업무조차 제대로 못 해낼 수도 있다. 아, 그래 인간이니까 가끔은 내 일을 남에게 떠넘기기도 한다. 그래도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하는 게 좋다.
그래야 ‘꼰대’라는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일러스트레이터 : 애끼(@aggi.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