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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록 Dec 05. 2018

'오피스'라는 이름의 던전,
그리고 오피스 몬스터

회사 관찰기 2편 

'오피스'라는 이름의 던전 

회사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호모 콤파니쿠스’들이 서식하는 오피스라는 공간은 정글보다도 다채롭다. 거대한 포식자와 연약한 피식자가 존재하지만, 때론 작고 민첩한 것이 크고 거대한 것을 쓰러트리기도 하는 곳. 본인이 그 현장의 한 가운데서 몸소 체험해야하는 다큐멘터리가 되면 꽤나 피곤하긴 하지만,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재미있는 대서사시가 펼쳐지는 곳이 바로 회사다. 그 대서사시를 풀어내는 주역들인 오피스 몬스터들에 대해 알아두는 것은 호모 콤파니쿠스의 생태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애끼


의지’의 아키메이지 (Archemage) : “그러니까.. 여러분이 의지를 가지고!”

그들은 의지만 강요한다. 매출이든 성과든 항상 ‘의지치’를 강요한다. 뭘 맨날 새롭게 하라고 한다. 말로 해서 새로워질 거 같았으면 나는 이미 신생아인데… 그들만 그걸 모르는 거 같다. 기본적으로 막무가내다. 그들은 ‘의지’를 원기옥처럼 모아서,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는 신비주의자들이며, ‘의지’만이 바로 그 우주의 신비를 알려줄 유일한 키워드로 인식한다. 이들에게 시스템과 프로세스 혹은, 리소스 부족 등의 문제를 얘기해봤자 의지가 박약한 인간으로 찍힐 뿐이다.  


토스 마스터 (Toss master) : “어, 제가 메일 공유했는데…. 못 보셨어요?!”

가끔 여기가 회사인지 배구대잔치인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다. 그냥 메일만 엄청 오고 가는데, 정작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메일에 답장 쓰러 회사 오는 느낌이다. 진행되고 있는 건 없는데 참조에 수신에 메일함만 폭파할 지경이다. 바로 토스 마스터들의 천국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업무를 참신한(?) 논리와 수사로 타인에게 떠넘긴다. 업무 분장의 그레이 존을 파고드는 줄타기의 달인들. 누구나 한번쯤 당해봤겠지만, 이들의 스페셜 스킬은 FYI. 누군가가 보낸 메일 위에 'FYI’ 세 글자만 쓰고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보내는 신공을 발휘한다. 이들은 자신이 업무를 전달했다는 ‘증빙’을 남기는 게 중요하지, 어떻게 전달해야 업무를 이어받아야 할 사람이 업무를 하는데 도움이 될 지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김소

언데드 킹 (Undead King) : “여러분, 이 회사가 잘 되면 여러분에게…블라블라…”

꼰대들이 스타트업에서 흑화(黑化)할 경우에 생겨나는 유형이다. 직원들은 이미 야근에 쩔어서 좀비화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혼자서만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흔히 말하는  ‘잡스’ 병 환자들이 많고 자신이 스티브 잡스나 제프 베조스 정도 된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안 되면 다 직원 탓이고, 직원들에 대한 애정도 별로 없어서 그냥 사람을 계속 갈아 넣어가면서 회사를 운영한다. 잡플래닛, 크레딧잡 같은 곳에서 별점 2개 이하의 스타트업은 대부분 이런 이들이 리더라고 보면 된다. 문제는 의외로 또 이런 신흥 교주 같은 스타일의 대표를 추종하는 중간급 관리자들이 제법 있어서, 좀비가 된 직원들을 대상으로 ‘비전’이라는 약을 파는 경우가 많다. 


프로노운 아티스트 (Pronoun Artist) : “이거랑 저거랑 해서, 막 이렇게 저렇게…”

일명 '대명사 예술가'들. 이들의 말은 대명사로 점철되어 있다. 한 마디로 ‘거시기하니까 거시기해서, 그걸 거시기하면 거시기하게 되잖애? 그냥 하면 안되고 거시기를 참 거시기하게 잘해 봐, 잉?’ 뭐 이런 식이다. 그들의 주요 특징은 하얀 색 여백이나, 당신이 써서 제출한 보고서 위에다가 볼펜으로 막 동그라미와 화살표를 그리면서 시작된다.  “응, 그니까… 이거랑 저거랑 해가지고, 막 이렇게 한 다음에 저런 방향으로 하면 괜찮지 않겠어?!”그나마 보고서에 동그라미 그려가면서 얘기하면 좀 나은데 하얀 백지를 앞에 두고 저러고 나면 미치고 팔짝 뛸 수 밖에 없다.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까딱 잘못하면 들을 때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무슨 얘기인지 알 거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히는 주화입마에 들 수 있다는 점이다.  


나도’ 족 : “ 맞아,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들은 누군가가 좋은 의견, 참신한 의견을 얘기하면 “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라고 덧붙인다. 물론 순수한 동의의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멘트를 습관적으로 하는 이들은  “나도 다 알고 있던 거야.”라는 걸 어필하고 싶은 것뿐이다. 물론 그들이 그런 아이디어를 품거나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자신이 그걸 몰랐다는 것, 그런 인사이트가 없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을 뿐이다. (보통 그런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있었다면, 차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저질러 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때문에 습관처럼 덧붙일 뿐이다. 자기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 인정하기 싫은 상사, 잘 알지도 모르면서 아는 척은 하고 싶은 이들에게 만연한 증세다. 더 재미있는 건, 한 3~4주쯤 지나면 정말 자기가 그런 생각과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한 것처럼 느끼고 있다. 누군가 했던 그 멘트를 되풀이하면서 “웅. 그러니까 내가 지난 번에 그렇게 말했잖아…”라고 말을 시작한다. 


업무 평론가 : “제가 보았을 때는…..”

자기가 그걸 보고 앉아 있을 게 아니라, 그 업무를 해야 할 사람이라는 걸 망각하는 유형이다. 본인이 게임을 해야 하는 플레이어라는 걸 망각하고, 타인의 업무에 대해서 평가만 한다. 그냥 자기 일만 안 하면, 그래도 다행인데 괜히 남의 일에 배놔라 감놔라 해서 쓸데없이 피곤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유체 이탈 화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예를 들면 자기가 영업팀 팀장인데  “영업에서 좀 더 최선을 다해야 할 거 같습니다.” 같은,  보통 “골을 넣으면서, 골을 안 먹으면 이길 수 있어요.” 같은 하나마나한 얘기를 덧붙이기 일쑤다. 되도록 말을 섞지 않는 게 좋다.

©김소


어장 관리자 : “그러니까 이렇게 해보자. 그런데 또 저렇게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들은 어떤 일의 해결책으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얘기한다. 사실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 경우가 많다. A안, B안, C안, D안… 등등으로 100가지 정도의 안을 내는데, 정작 그 중 하나의 개별적인 안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듣다 보면 실무자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실제 현장의 상황은 모르고, 관리자 관점에서 그냥 겉만 핥고서 툭툭 던지는 의견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작 실무자가 고민을 해서 A X B_1 X C X D_3 정도로 문제를 해결해서 가져가면…그제서야 한 마디 툭 던진다. “거 봐? 내 말대로 하니까 되지?”


샤인 셀러(Shine Seller) : “OO팀과 협업하여 잘 메이드하겠습니다.” 

태초에 그들이 있었다. 빛을 파는 사제들, 일명 광(光)팔이. 그들이 파는 빛은 언제나 겉보기엔 좋으나 실상이 없는 허황된 것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아직 확실하지 않는 결과물을 가져와서는 마치 다 된 듯이 이야기한다. 지금 99.9% 정도 성사된 건인데 다른 부서에 아주 쪼오오오금만 도와주면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상사에게 보고를 올린다. 그러고서는 유관 부서의 협업을 요청한다. 물론 족장은 아주 당연히 그러라고 하게 되어 있다. 이제 협업을 요청 받은 부서에서 같이 일을 하려고 보면, 상황은 딴판이다. 정작 앞으로 해야 할 일이 99.9%인 경우가 더 많다. 정작 일은 유관부서에서 다했는데 잘 되면 공은 이 광팔이들 세운 게 되고, 안 되면 유관부서에서 제대로 협조를 안 해줬거나 제대로 수행을 못한 탓을 한다. 그들은 그렇게 광을 팔지만,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어둠만 남아 있다. 


유리알 유희 마스터 : “제가 시뮬레이션해 본 바에 따르면…” 

그들은 사무실에 앉아서 ‘로직 만들기’라는 유리알 유희를 한다. 그들에게는 실제 현장에서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고, 그것이 실행 가능한가 보다는, 자신이 짠 이론과 가설, 혹은 프로세스 같은 것이 얼마나 논리적 정합성이 맞는가에 신경을 쓴다. 그리고 일이 안 되었을 경우 실행을 맡은 현업이 수행을 잘못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회사의 업무라는 게 무균의 연구실에서 이뤄진다고 착각한다.  


언어의 연금술사 : “클라이언트의 KBF를 고려하여 LFL 대비 Margin을 극대화하면서 매출을 Catch-Up할 수 있도록 Try하겠습니다.” 

앞에 나왔던 각종 ‘등신체’들을 섭렵한 이들이다. 단순히 ‘등신체’적인 화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이들을 언어의 연금술사로 몰아서는 안 된다. 정말 전문적인 일이라서 혹은 정말 거창한 일이라서 어렵게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으니까. 연금술사들의 특징은 명료하다. 그들은 쉽게 할 수 있는 말들을 어렵게 한다. 그리고 별것도 아닌 걸 거창한 언어들로 포장하여 대단한 것인 양 이야기한다. 


답정너  : “응, 편하게 말해봐…흐음… 근데 이건 어떄?”

이들은 항상 “응, 편하게 생각해봐. 응, 편하게 얘기해봐” 라고 시작한다. 그들이 편하게 얘기하라는 이유는 사실 심플하다.. “(어차피 네 얘기는 안 들을 거고,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편하게 얘기해봐.”라는 뜻이다. 저렇게 밑밥을 까는 이유는 의사결정 과정을 민주주의적인 척, 그리고 자신이 의견을 경청한 척 하고 싶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당신이 그럴싸한 아무 말을 많이 할수록, 그가 자신이 원하는 답을 빨리 내놓을 테고, 지루한 시간은 짧게 끝난다. 뭔가 유연화된 형태의 꼰대라고 보면 된다. 



일러스트레이터 

애끼(@aggi.drawing)

김소(@soeu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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