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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록 Dec 19. 2018

보고 등신체 : 회사어의 분식회계

회사 관찰기 4편 

호모 콤파니쿠스의 언어 체계 

각각의 회사라는 부족에 적응한 호모 콤파니쿠스들은 자신들만의 언어 체계를 세운다. 한때 패션 매거진 업계의 ‘보그 병신체’가 화제가 되긴 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회사 혹은 업종들은 다들 나름의 ‘보고 병신체’ 같은 특화된 언어 체계가 있다.(인터넷상에서 처음 화제가 된 키워드가 ‘보그 병신체’여서 일단 언급하였나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인지라 이후에는 ‘패션지 등신체’로 표기하겠음).

호모 콤파니쿠스의 특수한 언어 행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같은 일을 하는 업종에서 통용되는 ‘업종별 등신체’, 두 번째는 자기 회사(부족)에 특화된 특별한 단어나 관용어로 의사소통하는 ‘대기업 등신체’가 그것이다. 한 회사가 특정 산업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경우 첫 번째와 두 번째 언어 행위가 중복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업종별 등신체 : 내가 이렇게 많이 안다

한동안 회자된 패션지 등신체는 토씨 정도만 빼고 나머지는 죄다 영어를 갖다 쓰는 문체를 부르는 말이었다. 예를 들면 “이번 시즌 디자이너 ○○○의 런웨이가 선보인 엘레강스한 룩은 한 피스 한 피스가 모두 에지 있는 소울감을 패턴화 하여 벨 에포크 감성에 오마주를 더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오트 쿠튀르적으로 재해석한 마스터피스다” 같은 식이다.

‘업종별 등신체’란 단순히 외래어, 외국어 혹은 이상한 약어를 남발한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그런 이유로 등신체라고 비하해서는 안된다.. 한 전문 영역은 각자 고유한 어휘와 어법을 지닐 수밖에 없다. 내가 처음 접하는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새로운 업역의 사람들과 협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도 공부가 필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업역을 공부할 때 제일 먼저 시작해야 할 부분이 용어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기본 단위인 단어부터 시작해야 하듯이 말이다.

다만 글을 쓰고 말을 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함이다. 이런 어법이 등신체가 되는 순간은 바로 그 기본에서 벗어날 때다. 다른 사람에게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만큼 안다’고 과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딱 그렇다. 굳이 외래어나 약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그런 말을 남용한다.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누가 물어봐도 젠체하며 답하기 일쑤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언어를 게토화하고, 마치 어떤 특정 단어 한두 개를 자신들이 더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업무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곤 한다. 이런 것이 업종이나 부서별로 조금씩은 다 있게 마련이라 컨설팅 등신체, 마케팅 등신체 등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애끼

예를 들면

“현재 Phase 1에서는 자사의 SWOT 분석과 소비자들의 KBF를 리서치하여”,
“KOL 시딩과 관련하여”,
“타깃에 대한 커버리지 확대를 위하여”,
“PV 하락하였으나 CTR 및 Coversion Rate가 증가하여”

같은 말은

“1단계로 자사의 장단점 및 기회, 위기 요인과 소비자들의 주요 구매 요인을 분석하여”,
“인플루언서(유명 유튜버, 인스타그래머)에 대한 협찬 건과 관련하여”,
“타깃에 더 많이 도달하기 위하여”,
“일일 방문자 수는 줄었으나 클릭 수와 전환율이 늘어”

등으로 그나마 쉽게 풀어쓸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 등신체 : 제가 이렇게 거창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대기업 등신체라고 이름 붙이기는 했지만 이는 사실 회사의 규모에 따른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는 사내 문화가 경직되어 있을수록 이런 어법을 더 자주 쓰는 경향이 있다. 기업의 규모가 일정 정도 이상으로 커지다 보면 보다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자신들만의 약어 혹은 단어를 재정의하게 된다.

대기업 등신체 또한 특정 회사에서 자신들끼리만 통하는 약어를 사용한다는 것만으로 그들을 비하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그런 관용적인 어휘들로 현실을 은폐하려 할 때 비로소 등신체가 완성된다. 이들의 언어 행위는 어떤 사실이나 상황을 전달할 때 마치 고대의 수사법처럼 분칠을 해 오히려 상황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지 않다. 한마디로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하기 힘든 외교적 술사로 가득하다. 처음 큰 회사에 들어가서 제일 당혹스러웠던 것 중 하나는 일상에서는 절대 쓰지 않을 단어를 회의 석상에서 다들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애끼


“제가 이니시에이티브를 가지고 트라이하겠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B&C를 우선 파악해보았는데 베네핏은 이러하고, 컨선은 이러합니다.”
“LFL 대비 세일즈가 하락했습니다. 이를 업리프트 할 수 있는 캐치업 플랜이 필요할 듯합니다.”
“이슈 관련자 협의 후 이슈 오너를 결정하겠습니다.”

이 말은 사실

“제가 이 일 맡아서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좋을 것 같긴 한데, 저런 점에서 좀 문제가 생길 듯합니다”
“전년 대비 매출이 떨어졌습니다. 매출 향상을 위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할 듯합니다”
“관련자 협의하에 담당자를 정하겠습니다”

정도의 의미인데 다들 꽤 거창하게 이야기한다. 쉽게 풀어쓸 수 있고, 딱히 영어나 외래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이 같은 화법은 종종 남용된다. 혹여 한 문장 안에 디벨롭, 팔로업, 아이디에이션, 로드맵, 마일스톤, KSF (key success factor) 등등의 단어가 범벅이 되어 있으면 슬슬 뒷골이 땡기기 시작한다.

이런 화법이 재미있는 건 단어들이 거창해질수록 그 거창함에 비해 실제로 실행하고자 하는 일은 소소하거나 실제 목표 달성을 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실체가 공허할수록 말이 많아지듯 오히려 자기 의견이나 성과의 볼품없음을 거창한 단어로 감추는 느낌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동맥경화

공식 석상에서 보다 격식 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어려운 단어, 있어 보이는 단어를 쓴다고 그 실체의 빈곤감이 감춰지지는 않는다. 이런 화법은 실체와 상관없이 언어 뒤로 숨는 동시에 단어를 통해 그 빈곤함에 분칠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화법이 자연스레 통용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의사소통에 동맥경화 현상이 생겨난다. 박제화된 언어들이 회의 석상에서 난무하면서 회의는 점점 공허해진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어휘가 남발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를 솔직히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작 해야 할 말은 너무 날것처럼 느껴져 다들 꺼리고 모두가 정치인처럼 말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가 아니라 문제 해결 과정을 ‘있어 보이도록 만드는’ 데 치중하는 외교적 언사만 오간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건 대책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같은 말을 했다가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뿐이다. 아무리 그게 사실이고 현실이라고 해도 모르면 모르겠다, 대책이 없으면 대책이 없다,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이런 점에서 잘못했다’라고 말하기가 힘들어진다. 모르면 모른다는 걸 혹은 지금 방법대로는 대책이 없기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야 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오히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아니 그런 상황일수록 이 같은 화법은 만연한다. 대신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거나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엉뚱한 대책을 세운다. 그리고 괜히 말이 길어지고 거창해지게 된다.

말이든 글이든 본질은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호모 콤파니쿠스의 언어는 종종 이렇게 오용된다. 자신을 뽐내기 위해 혹은 자신의 업무를 과장하거나 실수를 은폐하기 위해.


일러스트레이터 : 애끼(@aggi.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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