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관찰기 6편
언젠가 콘텐츠 스타트업에서 일을 할 때였다. 이제 막 세팅을 시작하는 단계인데 체계에 대한 고민이 없으니 문제들이 하나 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절차나 체계, 그리고 프로세스(Process)라는 게 원래 그렇다. 그걸 아무리 잘 만들어봤자, 구체적인 성과물이 나오지는 않는다. 업무라기보다는 부서 간의 업무를 조율하고, 일이 흘러가게 만드는 메타(Meta)적인 작업에 가깝다. 그러니 그런 것에 몰두해봤자 금방 눈에 띄지 않는다.
어떤 조직은 프로세스를 잡느라고 시간만 잡아먹고, 어떤 조직은 일단 일부터 벌이고 본다. 어떤 조직은 프로세스만 잡으면 일이 되리라 생각하고, 어떤 조직은 프로세스도 안 잡고서 별 탈 없이 돌아가리라 생각한다. 둘 다 꽤 착각이다. 프로세스라는 게 처음부터 완벽하게 잡힐 리 없다. 그러니 지난 경험에 맞춰 최대한 짜두고, 바뀌는 상황과 발견되는 문제들에 따라 하나하나 개선해 갈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하겠다는 생각에 일의 타이밍을 놓친다면 이 또한 일종의 결벽증 같은 거다. 그냥 항상 최신 버전이 있고, 상황에 맞춰서 끊임없이 업데이트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애초에 체계를 잡을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일을 굴리니, 하다가 허무해지는 순간들이 계속 터져 나온다. 공장으로 따지자면 제품을 만들기 위해 생산라인을 돌려 봤자, 중간에 끊임없이 제품 디자인과 기능이 바뀌고 그 와중에 불량률이 말도 안 되게 올라가는 모양새다. 체계를 잡았더라면 예측 가능하고 대처 가능한 것들로 분류할 수 있는 일들조차, 죄다 비상사태가 된다. 축구로 따지면 동네 축구 비슷하다. 모두가 열심히 달렸는데 계속 구멍이 생긴다. 하나를 막고 나면 또 하나 생기고.... 다들 정말 열심히 했는데 돌아보면 헛발질만 한 거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피해를 주게 되고. 상황이 이 모냥인데 위에서는 그냥 '니들이 더 열심히 해야지'라며 사람을 갈아 넣을 생각만 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블랙기업의 시작은 흔히 이렇다.
그런 와중에 야근을 많이 하는 게 어느 순간부터 당연시되기 시작했다. 직원들도 열심히 한다고 자신의 퇴근 시간이 빨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 자연스레 업무 시간 중에 점점 루스해진다. 빨리 제작해 넘겨봤자 컨펌하는 사람이 오후 4~5시쯤에나 보고 그제야 수정을 넘긴다. 그동안 에디터와 디자이너는 마냥 대기하고 있다.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로 따지면 특정 구간에서 병목현상이 생기거나 대기 시간이 길어져 컨베이어 벨트 자체가 멈춰 있는 시간이 엄청 길어진 거다. 그 와중에 만들어내야 하는 물량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니, 고스란히 직원들의 야근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물론 ‘야근이 많다, 많지 않다’라는 잣대만으로 그 회사가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수는 없다. 자발적 야근, 즉 회사 일이 내 일 같아 야근을 하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열정만큼 정당한 대가와 처우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야근의 유무가 좋은 회사냐 아니냐의 판단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또, 큰 프로젝트 등 비일상적인 이슈로 불가피하게 해야 하는 야근이라면 내가 좀 수고스럽더라도 그 기간이 언제까지인지 예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야근 자체를 당연히 여기고 구성원들에게 명시적으로 강요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창업한 지 반년이 안 된 회사가 입사 3개월이 넘어서자 전형적인 블랙 기업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업무상 논리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위에서 하라고 하면 하는 조직, 논리가 아니라 관계로 설득하는 조직, 그래서 무엇 하나 체계화되지 않은 조직.
이때의 경험과 그 후 접한 다른 블랙 기업의 이야기를 살펴보니 블랙 기업의 일반적인 특성을 추출할 수 있었다. 지금 당신이 다니는 회사가 그렇다면 이직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블랙 기업의 첫 번째 조건은 직원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회사나 일시적으로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블랙 기업의 특징은 그것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은근히 조장하며 압박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조직 구성이나 프로세스, 그리고 절대적인 인력 부족 등 구조적인 결함을 직원들의 개인적인 시간으로 땜질해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회의 시간을 오후 8시나 9시로 잡는 걸 당연시하고 그 의제들이 다음 날 아침까지 완료되기를 바란다. 또 직원들이 회사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도 계속해서 메신저로 업무를 지시한다. 퇴근 이후든 새벽이든 주말이든 심지어 휴가 중에도 끊임없이 메신저 알림이 울리는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된다.
노동시간에 대한 합의는 노동자와 회사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약속이다. 그런데 계약서에 적혀 있기만 하지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회사. 젊은이들을 불러다가 그들의 시간을 좀먹으면서 버티는 주제에, 뭔가 진취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자위하는 회사. 그런 회사는 일단 블랙리스트 영순위다
약을 오남용하면 약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다. 한 회사의 직원도 마찬가지다. 직원을 오남용하면 그건 직원이 아니라 사용자인 회사의 잘못이다. 그런데도 회사는 항상 직원들이 열정이 없다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사실 그들이 열정 혹은 의지를 강조하는 이유는 사용자 입장에서 별다른 투자 없이 말을 꺼내기 제일 쉽기 때문이다. ‘(나는 뭘 더 해줄 수 없지만) 니들이 잘하면 되잖아.’ 물론 직원들의 열정 또한 회사가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자산 같은 거다. 하다못해 20~30년 전에 나온 ‘삼국지’ 같은 게임에도 각각의 부대에 사기士氣 morale 지수가 있다. 사기가 높은 부대는 때론 병력의 규모나 장군의 능력치를 넘어 승리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열정熱情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풀이하면 ‘뜨거운 감정’이다. 그러니까 열정 또한 감정이고, 따라서 대상과 나 사이의 상호 관계다. 내가 아무리 열정이 있어봤자 상대가 점점 못나게 굴면 당연히 식을 수밖에 없다. 업무나 회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무리 열정적이어도 회사 시스템이 비합리적이면 하고 싶어도 하지 않게 되고 할 수 있어도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열정을 강요하는 회사는 그런 생각이 없다. 열정은 자가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열정에 불을 지피려면 끊임없이 원료를 채워 넣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없다. 유일한 당근이 “나중에 잘되면 인센티브 줄게” 정도다.
이런 회사들의 특징은 희한하게 일을 그렇게 많이 하는데 나아지는 게 없는 점이다. 애초에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는 능력 자체가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더닝-크루거 효과'처럼 윗선들이 무능한데, 정작 너무 무능해서 자신의 무능을 인지하지 못하는 지경이다. 그러니까 땜빵을 땜빵으로 메운다. 이는 회사의 규모와 상관이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되면 마이크로매니지먼트가 판을 치게 된다. 가이드와 프로세스가 없으니 부하 직원들은 업무 방향을 잡지 못하고 관리자는 자기가 하나하나 체크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결국 아주 낮은 단계의 업무 결정조차 관리자가 해주지 않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고 그 대기 시간이 고스란히 업무 시간 낭비로 이어지니 일이 제대로 진척되기 어려워진다.
실질적인 팁을 드리자면 아래와 같은 회사들은 입사 전에 한 번 더 고민하는 게 좋다.
1. '잡플래닛' 평점 2.0 이하인 곳 : 직장인들이 회사에 대한 리뷰를 남기는 사이트 잡플래닛(www.jobplanet.co.kr)은 꼭 챙겨보자. 평점 2.0이라는 것이 꼭 절대적인 기준선은 아니다. 요즘은 평점이 안 좋으면 인사팀에서 작업(?)을 하는 회사들도 적지 않다. 평점 2.0 이상이더라도, 평점 간의 표준편차가 큰 회사(예를 들면 1점과 4~5점만 있고 중간 점수대가 없는 경우)는 그런 경우일 수 있으니 다시 살펴보자
2. '크레딧잡'에서 퇴사율이 높은 곳 : 크레딧잡(https://kreditjob.com/)은 국민연금 등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평균 연봉과 입사 및 퇴사자 수를 알려주는 사이트다. 퇴사율이 높다는 건 그만큼 회사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아예 퇴사자수가 노출되지 않게끔 요청해 놓은 회사들이 있는데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게 좋다.
3. 1년 내내 비슷한 직군의 모집 공고가 뜨는 곳 : 사세가 엄청 확장된 거 같지도 않은데(그러니까 전체 회사 직원 수가 늘어나지도 않았는데) 계속 비슷한 공고가 뜨는 회사들은 사람들이 버티지 못하고 계속 갈린다는 뜻이다.
4. ABC는 모르면서 XYZ만 말하는 곳 : 특히 스타트업 같은 곳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대표가 말은 장황하고 먼 장밋빛 미래에 대해서는 줄줄줄 늘어놓으면서, 당장 그래서 뭘 해야 할지를 모르는 거 같아 보이면 그냥 아무 생각없이 발길을 돌리면 된다. 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블랙 기업이라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만두는 게 나을 수 있다. 고생하는 만큼 배움이 쌓인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커리어의 방향성과 맞아떨어진다면…. 그런데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실 같은 고생을 다른 곳에 가서 하면 더 많은 걸 배우고 쌓을 수 있을 테다. 힘들면 그만둬도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인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그런데 블랙 기업은 직장인의 자산이라 할 수 있는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감퇴시킨다. 체력과 정신력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그렇다. 체력적으로만 힘든 게 아니라 자존감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오니까 돈을 버는 것 같지만, 지속적으로 노동력을 생산할 수 있는 기본 자산을 까먹고 있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탈출하는 게 차라리 낫다.
블랙 기업이 직장인에게 가하는 해악은 장기적 자산을 갉아먹는 것을 넘어 사람을 근시안적으로 만든다. 눈앞에 닥친 문제에 급급하다 보니 미래를 계획하는 데 집중하기 위한 정신 능력 자체에 해악을 끼친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탈출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일러스트레이터 : 애끼(@aggi.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