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들려주는 신화 1편
하나의 시대는 하나의 사고 체계를 만들어낸다. 전쟁이나 혁명 같은 큰 사회적 변화로 인해 그 사고 체계를 지지하는 사회 체제 자체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그것들은 때론 참으로 지당해 보인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 일본의 제국주의, 미국의 노예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 각각의 사고 체계는 나름의 신화를 동원해 당대 현실을 당연하게 인식하도록 만들었을 테다. 그러나 그 시대의 끝에서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돌이켜보는 시간이 찾아오게 된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시대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알게 모르게 그 시대의 사고 체계 안에서 머무른다. 해서 직장 생활은 자본주의 사회와 회사라는 부족이 만들어내는 신화로 가득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 시스템 안에서, 그 구조 안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런 신화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신화임을 알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모른 채 받아들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일과 삶에 대한 자기 객관화의 가능성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장인을 떠나 개인으로서의 자아와 자존감을 지키는 것 또한 거기에 달려 있다. 이번 회차부터는 그런 신화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는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 가끔은 자판기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루 8시간을 한 달 동안 ‘회사’라는 자판기에 꾸준히 넣으면, ‘월급’이라는 캔이 나오는 느낌이다.
일본 영화 <잠깐, 회사 좀 관두고 올게>를 보다 보면 실적에 끊임없이 쪼이는 영업 사원들의 전형적인 직장 생활을 볼 수 있다. 아침 체조부터 시작해서, 군대 같은 위계질서 속에서는 부장은 끊임없이 소리를 친다.
돈을 받았으면 그만큼 성과를 내야 할 거 아냐!?
그 말을 가만히 듣다 보면 엄청 타당해 보인다. 그러게 사람이 돈을 받았으니 뭐라도 대가를 지불해야 할 텐데… 직장인이 월급 대신 내어줄 수 있는 게 성과 말고 뭐가 있겠는가. 회사에서 월급을 입금해줬으니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어주는 게, 자본주의적 등가 교환의 법칙에 맞는 게 아닌가 하고.
그 심리를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아래와 같다.
‘회사가 월급을 주면 호모 콤파니쿠스는 성과를 뚝딱 만들어낸다.’는 가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면, ‘돈을 받았으면 성과를 내야 한다.’라는 명제는 회사가 호모 콤파니쿠스들을 세뇌시키는 일종의 신화다. 저런 얘기를 듣다 보면 우리가 회사에서 돈을 받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 ‘성과’라고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제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노동 시간과 노동력이다. 그것을 성과로 치환할 수 있는 구조는 회사가 끊임없이 만들고 고민해야 한다. 공장을 경영한다면 어떻게 공정 프로세스를 체계화하고 자재의 손실을 줄이고, 신기술을 더해서 동일한 노동시간과 노동력으로 원가 절감 및 품질 향상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일반 서비스 업종이라도 마찬가지다. 고객을 응대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각각의 단계들에서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매뉴얼과 대응을 통해 자신들의 서비스를 고부가가치화하는 게 필요할 터다.
사실 위의 그림은 아래와 같이 바뀌는 게 맞다.
이제 “돈을 받았으면 성과를 내야 할 거 아냐?”라는 문구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이 문구에는 숨겨진 단어가 몇 개 있다.
“돈을 받았으면 (네가 열정을 가지고 노력을 해서 ) 성과를 내야 할 거 아냐?”
가 조금 더 정확한 번역이다.
성과라는 건 어차피 개인이 혼자서 어떻게 한다고 해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개인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큰 회사일수록 개인이라는 개체가 성과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쉽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게 사실이다. (개인이 회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건, 그만큼 회사의 구조나 시스템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개인의 역량에 따라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니까.)
한 번 성과라는 결과값을 내는 변수들을 고려해보자.
성과 = 개인의 의지 X 업무 프로세스 X 물적 인프라 X etc
저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하고 있을 테다. 그런데도 ‘열정’이나 ‘의지’만을 강요하는 이유는 사실 심플하다. 회사나 상사 입장에서는 그게 제일 쉽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어쩌고 프로세스를 어쩌고 얘기하면 딱 질색이다. 시스템을 만들려면 돈이 들고, 그 예산을 받아오려면 상사도 더 위의 누군가에게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프로세스도 마찬가지다. 부서 내의 프로세스만 바꾸는 거면 몰라도, 대부분은 타 부서, 크게는 타 계열사나 파트너사와 엮여 있는 경우가 많고, 실무자들이 그거 풀어달라고 하면 상사 입장에서는 일이 생기는 거니까 귀찮고 번거롭다. 그러니 상사나 회사 입장에서는 그냥 개인에게 의지를 강요하는 게 가장 쉽다. 의지나 열정은 이럴 때 나오는 말이다. 시스템에 투자를 할 생각도 없고, 프로세스에 대해 고민하기도 싫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만만한 게 '의지'다. 하지만 이걸로 가능한 건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평지에서 제자리 높이 뛰기를 했을 때 똑같은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3명 있다고 치자. 그런데 한 명은 트램펄린 위에서, 한 명은 모래밭에서, 한 명은 늪에서 제자리 높이 뛰기를 하기로 했다면? 그 기록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아니 늪에서 뛰던 사람은 뛰려고 하면 할수록 가라앉아서 나중에는 목숨까지 위태로울지도 모른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조직 내의 구성원들의 역량을 두배 세배 발휘하게 해주는 트램펄린 같은 곳도 있고, 딱 자기가 노력한 만큼의 결과 정도는 나오는 회사도 있고, 아니면 노력하는 사람들일수록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늪 더미 같은 회사도 있다. 성과가 안 나는 게, 개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회사일수록, 노답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성과가 안 나오는 건, ‘내 잘못만은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받는 월급은 성과에 대한 것이 아니다. 성과가 0이어도 월급은 받는 게 당연하다. 늦잠을 잘 수 있는데도 굳이 찬바람 휘날리는 겨울 아침에, 만원 버스를 타고 아침 9시까지 사무실에 와서 앉아 있는 대가. 집안 화장실에서 편히 일을 볼 수 있는데도, 굳이 회사의 차디찬 변기 위에 엉덩이를 대고 일을 보는 대가.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데도 팀장이 원하는 순대국밥을 점심으로 먹고 있는 대가. 딱히 할 일이 없는데도 남들이 다 야근을 하고 있어서 같이 앉아 있는 대가 등등. 하루의 3분의 1을(그것도 최소로 봤을 때) 회사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대가다.
어쩌면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뭐라고 하는 회사에게 오히려 우리가 화를 내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관점에서는 단지 월급을 준다는 이유로, 그들은 우리의 인생을 탕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이 안 되는 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때론 남 탓을 해도 좋다.
그런데 남 탓'만' 하고 있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그것들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언제나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 ‘지금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까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바로 그 '남 탓'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애초에 남 탓으로 해결될 일이면 애초에 '우리'는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남 탓’만’ 하고 있는 우리는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개인의 ‘의지’와 ‘노력’을 적용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그렇게 찾아낸 문제점을 개선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 그럴 수 있는 토대를 개인에게 만들어주는 것은 역시나 조직의 의무다. 그걸 하지 않고, “어 그거, 당신이 아니까, 당신이 말 꺼낸 거니까 알아서 계속해봐.”라고 새로운 짐을 개인에게 짐 지우는 식으로 해결해버리면 직원들은 점점 더 복지부동하게 되어 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하다. 하지만, 개인이 그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그 의지를 배양해주는 것은 결국 조직의 몫이다. 열정이 자산이라면, 그 또한 일방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일러스트레이터 : 애끼(@aggi.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