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들려주는 신화 2편
각각의 회사들은 모두 자신만의 창조(?) 신화가 있다. 그 신화의 대부분은 창업자가 과감한 결단과 불굴의 의지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나서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음을 강조한다. 듣는 이는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의 회사를 통해 얻은 부와 권력은 창업주의 지난한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그것이 바로 회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또 하나의 신화다. ‘당신이 노력하는 만큼 보상받을 수 있다’라는 신화. 사실 이 신화는 회사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차원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자기 계발서와 처세술 책이 서점 매대 하나를 차지하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지도 이미 오래다. 2000년대 초반, 취업이 조금씩 어려워지고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강화되던, 그래서 괜찮은 일자리와 그렇지 않은 일자리 사이의 간극이 서서히 벌어지던 시절. 그즈음부터 붐이 일기 시작한 그 책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당신이 잘하면 된다고,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만 잘하면 된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모두 내 안에 있다고. 결국 모든 것이 개인이 하기 나름이고, 시스템이 어떻든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있다’라고. 그래서 정작 그 시스템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우리가 노력을 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할 수 있는 것이 노력뿐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노력도 부족해서 ‘노오오오력’을 한다. 그런데 노력을 한다는 건 일종의 투자다. 시간, 체력, 정신력, 스킬 등을 ‘투자’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노력을 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걸. 끊임없이 탈락의 경험을 맛보아야만 했던 20대의 취업 준비생 시절부터 직장 생활을 거치며 그런 좌절은 어느새 하나둘 축적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는다. 그 모든 최선이 항상 해피 엔딩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걸. 또 노력한다는 건 그 자체로 투자이고, 성공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하기 위해서는 그 노력을 뒷받침해줄 리소스(체력, 시간, 돈 등)라도 있어야 한다는 걸. 노력조차 개인의 의지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할 만한 여건이 일정 부분 작용할 수밖에 없다. 노력을 많이 한다는 건 투자로 따지면 고위험 high risk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고도성장 시대에는 노력을 많이 해도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 고위험, 고수익 high risk, high return이 가능했을 테니. 지금은? 글쎄다.
게다가 실패로 끝난 노력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중에 성공한 몇몇의 이야기만 회자된다. 성공하지 못한 노력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여전히 ‘노오오오력’이 부족했다고 말한다. 그저 성공할 때까지 노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들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지만 최선 같은 거 다해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 최선이 성과라는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회사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성과를 내지 못한 일은 애초에 일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일이라는 건 맥락이 있고 히스토리가 있는데, 어느 순간 그것들은 다 사라지고 보고서에 한 줄 기록으로 남는다. 전년 대비 매출 하락, 성과 미달성 등. 그 단어들 뒤에는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었지만, 신문 헤드라인처럼 한 줄로 정리되어버린다. 그 안에는 누군가 최선을 다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들은 담길 공간이 없다. 아니, 그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다. 어느 순간 실패에 대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하면 새로운 헬게이트가 열린다. 뭐라도 일을 한, 혹은 해보려 한 이들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들은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결백함(?)으로 안전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처음 새로운 직장에 들어오면 대부분의 사람은 열의를 가지고 일에 임하게 마련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기만 자꾸 지친다는 걸 깨닫는다. 회사 내에 ‘적절한 업무량’에 대해 고민하는 상사가 없는 경우도 있고, R&R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그냥 급하니까, 할 사람이 없으니까, 마침 네가 할 줄 아니까, 이런 식으로 일이 하나둘 모여든다. 공장으로 따지면 기계의 생산량은 생각하지 않고 자꾸 오더만 들어오는 상황이다.
이쯤 되면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과부하에 시달리며 일을 해내도 새로운 문제가 등장한다. 일이 잘되면 남의 공이고, 안되면 내 탓이 되는 상황이 늘어난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잘못할 일조차 없으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의욕을 갖고 R&R의 경계에서 아무도 챙기지 않던 일을 맡아서 했다면, 더더욱 그렇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점점 일을 더 많이 하게 되는 이상한 악순환이 시작된다. 어떤 일을 해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이 나뉘게 되면서 일을 해본 사람에게만 일이 몰리는 현상이 생긴다. 이제 슬슬 사람들이 왜 복지부동하는지,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업무만 하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지 이해가 된다.
사실 R&R를 아무리 명확히 만들어봤자 새로운 업무나 프로세스가 생기면 새로운 틈새들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 틈새를 메우는 건 어쨌거나 실무자들이 ‘알아서’ 하다가 다시금 R&R를 정하거나 프로세스를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알아서’라는 부분이 없어진다.
R&R를 촘촘히 쪼개 놓으면 나아질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R&R를 촘촘히 쪼개 놓아야만 그것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면 이미 그 자체로 문제다. 서로 일을 떠넘기거나 방치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꼼꼼히 나눠도 맥락과 해석에 따라 자신들이 책임지지 않을 논리를 만들게 되어 있다. 일종의 계약서와 비슷하다. 서로 믿으면 조금 엉성해도 일은 잘된다. 계약서를 잘 써놓는다고 해서 안될 일이 잘되지는 않는다. 이런 문화에서의 R&R나 프로세스는 일종의 계약서 같은 거다. 실제로 일이 얼마나 잘될지, 운용 가능할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서로 책임져야 할 때 근거가 될 것을 만드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에는 정작 일은 안 굴러가는데 이런 증빙을 만들어내기 위한 페이퍼워크만 무한 증식하는 경우도 있다.
조직의 관점이 아니라 개별 개체의 관점에서는 이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점점 더 나은 선택이 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손실 회피에 대한 성향이 더 강하고, 이것은 회사 업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노력하지 않아서 욕을 먹으면 괜찮다. 적어도 그동안은 편했으니까. 그런데 일을 하고 욕을 먹으면 억울하다. ‘아, 그냥 일을 안 하고 말지, 뭐.’ 그렇게 노력하지 않는 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게 된다.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노력은 항상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을 가능성 혹은 개연성이 증가할지는 몰라도 그 보상은 확실치 않다. ‘일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90% 노력했으니까 90점은 줄게’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99%가 되었더라고 1%가 부족하면 그것은 1이 아닌 0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노력한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 노력뿐이기 때문이다. 또 노력하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기회라는 것들이 분명 있으니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위한 트레이닝 같은 것. 지금 있는 운동장에서 열심히 100m 달리기를 해봐야 나중에 다른 운동장에서 100m 달리기를 해도 잘 뛰게 마련이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을 수 없다 해도, 무언가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배우고 습득하게 된다. 노력의 끝에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을 한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또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자존감에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정말 숨 가쁘게 뛰어봐야 나중에 후회도 남지 않으니까. 나는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고, 적어도 나 자신에게라도 떳떳해야 하니까. 그래야 일이 잘되지 않아도 털어내 버리기 쉬우니까.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 같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은 버리는 것이 좋다. 보상은 둘째치고 ‘배우고 습득할 게’ 없는 것이라면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 똑같은 육체 활동이어도 어떤 것은 열심히 하면 근력이 되지만, 어떤 것은 골병만 든다. 업무도 마찬가지다.
일러스트레이터 : 애끼(@aggi.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