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들려주는 신화 4편
회사를 다니고 나서부터 항상 바빴던 것 같다. 알게 모르게 많은 중압감에 시달렸다. 다들 그런 경험을 한다. 왜 바쁜지 모르겠는데 바쁘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도 했다. 저기 어딘가에는 카프카적인 ‘중앙’이 있고 그곳에는 끊임없이 일을 찍어내는 공장이라도 있는 거라고. 우리는 그래서 항상 눈앞에 닥친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며 분주하게 보내는 것이 아닌가. 어떤 날은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이 많은 일이 사실은 누군가가 윗사람에게 보고하기 위해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주간 보고에 뭐라도 써야 하니 말이다.
우리는 종종 이런 얘기를 듣는다. “프로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 업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지만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을 가만 보면 굳이 안 한다고 해서 세상이 망하거나 누가 죽거나 할 일은 또 그리 많지 않다. 광고 한 번 안 한다고 매출이 크게 차이 날 리도 없고, 서살 매출이 조금 줄어들었다고 세상이 망하지도 않는다. 특히나 사회 초년생 시절에 한 글 쓰는 일이나 콘텐트 만드는 일 또한 ]그 때문에 누가 죽고 살고 하는 일도 아니다. (생각해보니 자본주의사회에서 하는 일은 결국 돈을 돌게 하기 위해서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으면 안 되는 일은 농사 등의 1차 산업을 빼면 별로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페이스북 데이터팀의 전 관리자이자 클라우데라 창업자인 제프 해머바커 (Jeff Hammerbacher)가 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사람들이 광고를 클릭하도록 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게 말이다. 시리아 동구타에서 2017년 한 해 동안 1000명이 넘는 아이가 죽어가는 동안, 누군가는 어떻게 하면 광고 배너를 한 번 더 클릭하게 할 것인가를 밤새 고민하고 있다는 건 어딘가 부조리하기까지 하다.
“올해 매출 ○○○을 했으니 내년에는 2배를 합시다” 같은 얘기가 황당하게 들리는 건 그래서다. 이런 숫자 놀음이 허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람을 채찍질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목표. 정작 인간의 행복과는 상관없는 숫자에 의한, 숫자를 위한 목표에 모두 내몰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모두 ‘매출’이라는 매트릭스에 갇힌 네오 같은 느낌.
지금껏 내가 해온 일은 조금 못한다고 해서 누가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치거나 혹은 상처를 줄 여지는 딱히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의사나 소방관, 경찰 같은 특수한 직업이나 현장에서 안전을 다루는 일이 아니라면 사무실에 앉아서 키보드 두드리는 일 중에서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일은 그다지 없지 않을까 싶었다(물론 나쁜 기사로 명예를 훼손하기도 하고, 설계도를 조작해서 부실 시공을 유발하거나 분식 회계로 투자자들을 극한에 처하게 하는 화이트칼라 범죄도 있지만 그건 정상 업무를 하면서 벌어진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범죄적 행위여서 생겨나는 문제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다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한다. 매출 압박에 시달리다 투신을 하고, 사람들 즐겁게 해주자고 만드는 TV 프로그램을 만들다가 스트레스를 받아 자살을 하고, 즐기자고 만드는 게임을 만들다가 과로사하는 세상이라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기자 시절에 이런저런 커리어 관련 칼럼을 많이 썼다. 취업 포털과 함께 대규모로 설문을 하기도 했다. 그때 기억나는 칼럼 중 하나가 ‘회사 우울증’과 관련한 것이었다. 설문 답안을 받아 들고는 조금 먹먹했다. 다들 참 힘들게 사는구나 싶었다.
그 유형도 매우 다양했다. 회사에만 나오면 힘이 빠지는 ‘무기력&도피형’, 다음 날 회사 갈 생각에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불안형’,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히스테리형’,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로 생기는 ‘회사 내 대인 기피형’ 등.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충격적인 건 ‘자해형’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차도에 뛰어들어야지 생각한 적이 있다.”
“출근길에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출근길에 다리가 갑자기 무너져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답변을 보고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진 건, 나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한 번씩은 해봤다는 거다. 사실 이런 사람일수록 업무가 조금만 잘못되어도 자기 비하를 하거나 의욕을 잃기 쉽다. 심지어 만성 우울증으로 진행되어 장기 치료를 요하는 경우도 많다.
회사 일도 중요하고 밥벌이도 중요하지만 자살 충동까지 느끼면서 직장에 다니는 게 맞을까. 먹고살자고 다니는 직장인데 다니기 싫어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야 될까 말이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일을 할 때면 ‘그래 봤자, 회사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내 회사도 아니다. 유한 책임이고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하면 될 뿐이다. 그 이상은 어차피 내 영역이 아니다. 회사에서 월급 받아 먹고살면서 ‘그래 봤자, 회사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조금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너가 아닌 이상 회사에서 내 권한과 업무 범위는 어차피 한계가 있다.
물론 ‘그래 봤자, 회사 일’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함께 일하는 이들이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맞춰줄 필요는 있다. 회사에 다니다 보면 내가 보기엔 하나도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일인데, 상사든 동료든 누군가는 그런 것에 엄청 신경을 쓴다. 타인이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그 기준에 맞춰주는 것과 나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다르다. 마음 깊숙이 있는 자아는 ‘이게 뭐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라며 투덜댈지라도, 나의 회사형 페르소나는 “부장님, 이렇게 한번 해보면 괜찮긴 하겠는데요”라며 받아주는 것이다.
‘그래 봤자, 회사 일’이라고 말은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업무들도 내 인생의 일부분이고, 업무를 통해 만나는 이들과의 관계도 내 인생의 일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워크-라이프 밸런스라는 개념은 그 맥락이 이해되면서도 조금은 아쉽다. 우리나라처럼 계약한 근로시간 이외에도 수시로 직원들의 시간과 노동력을 전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면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통해 일정한 방어막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삶을 회사에서의 삶과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애초에 일work과 인생life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인생이라는 더 큰 범주 안에 일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루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뚝 떼어내 ‘이건 내 삶이 아니야’라고 하는 건 그래서 적합하지 않다.
그러니 ‘그래 봤자, 회사 일’이지만 그 일에 최선을 다한다. 상명하달 방식의 조직 문화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는 주인 의식을 가지고 일하기 쉽지 않고, 뭔가 말도 안 되는 일이 연이어 뻥뻥 터져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김이 빠지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한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웹툰〈미생>에 나온 조치훈 9단의 말을 떠올린다.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그래도 내 바둑이니까.”
그러게 말이다.
“그래 봤자, 회사 일”이지만 “그래도 내 인생”이니까.
일러스트레이터 애끼(@aggi.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