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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록 Feb 13. 2019

당신의 태그들 : 회사형 정체성의 3요소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자기소개를 할 경우가 생기면 우리는 흔히 소속 회사, 부서, 직급 등을 붙여서 설명한다. 그런 소개는 적어도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설명하기에는 족하다. 예를 들면 ‘○○전자 사업전략팀 ○○ 차장’, ‘○○패션 마케팅팀 ○○ 과장’ 같은 소개가 그렇다.

저 한 줄의 설명에는 조직과 업무, 지위가 함께 담겨 있다. 그리고 직장인에게 이 3요소는 본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꼼꼼이 살펴보면 이것은 '나'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업무에서 하는 기능'에 대한 설명에 더 가깝다. 문제는 저런 식의 자기소개를 반복하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을 저 안에서만 찾게 되는 편향성이 생겨난다. (게다가 사회생활을 할 나이가 되면 본인을 소개할 자리가 업무적인 자리 외에는 꽤나 드물다.) 물론 이 안에도 '나'란 존재는 분명 녹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요소들을 스스로 잘 발라낼 필요가 있다. 조직,지위, 업무 중 어떤 것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개인의 정체성에 상이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조직’에 방점을 찍는 경우다. 이런 경우 종종 몸담고 있는 조직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이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제가 ○○전자에 있을 때는…”, “저는 ○○포털에서 일했는데…” 등의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있는 조직이나 하는 업무도 아니고, 과거 다녔던 회사에 대해서 늘어놓는다. 재미있는 건 이름 좀 대면 알 만한 큰 회사를 다닌 사람일수록 그 회사를 나온 후에도 더 많이 들먹인다. 물론 지금 그런 직장에 다니고 있는 중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저희 OO(회사명)에서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데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내규나 업무 방식이 마치 세상의 전부부이고, 나머지 세상이 그 규율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경이다.사실  조직이란 내가 몸담고 있는 동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될 수 있지만 떠나는 순간 나와 전혀 무관한 곳이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조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건 정작 자신의 본질과는 먼 얘기가 된다.


다음으로는 ‘지위’에 방점을 찍는 경우다. 물론 이 지위는 어느 조직 내에서의 지위냐는 점에서 첫 번째 경우와 항상 맞물려 있다. 지위에 방점을 찍는 이들의 속내에는 알게 모르게 ‘내가 ○○인데…’라는 자부심이 있고 다른 이들을 서열화한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업이 아니라 지위에 더 관심을 둔다. 자신이 어떤 업무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알고 보면 '그 조직의 그 지위에서 그 업무를 하는 것'이 만족스러운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그 직업과 그 지위를 통해 알게 모르게 누리는 권력이나 편익에 젖어들기 쉽다. 검사나 경찰 같은 권력 기관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그 권력을 행사한 게 아니다. 자리가 그들에게 준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 그런 타이틀을 내려놓았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회사라는 조직도 마찬가지다. 어떤 회사에서 어떤 업무를 하고 있다는 건, 단지 그 이유로 자의든 타의든 일종의 권력을 가진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걸 자신의 권력이라고 착각한다.


위의 두 경우는 자신의 정체성이 ‘회사’라는 태그에 의해 휘둘리게 된다. 이직이나 전직을 통해서 새로운 조직에 몸담거나 업무를 해야 할 때 유연하게 대처하기도 힘들다. 예전과 달라진 위치나 업무가 자존심(자존감이 아니다.)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저런 것들을 하나둘 벗겨내고 난 자리에 오롯한 ‘내’가 있다. 물론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 그 안에서의 지위 또한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이 비대해지는 순간, 회사라는 테두리를 벗어난 나는 왜소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건강한 일이 아니다.

100세까지 살지 못 살지 모르겠으나 인간의 기대 수명은 늘어났고, 정작 직장 생활을 하는 건 20~30년 남짓. 길어야 40년이다. 내가 몸담고 있던 직장은 직장일 뿐이고 나는 나다. 이게 분리되지 않으면 골치가 아파진다. 많은 중년 남성들이 은퇴 후 상실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자아와 자신이 몸담았던 직장을 지나치게 동일시해왔기 때문이다.

©애끼

업(業)으로서의 정체성

그렇다고 회사형 정체성이 모두 나의 정체성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요소들 중에서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야 할 요소와 자칫 매몰되면 안 될 요소가 있을 뿐이다. 회사형 정체성에 매몰되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직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 정체성이 어느 곳에 가든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코어가 된다.조직, 업무, 지위 중 이제 남은 것은 ‘업무’다. 회사형 정체성을 구성하는 3요소 중 개인의 정체성과 접점을 만드는 건 바로 이 업무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전자 마케팅 부서의 ○○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것

 ‘마케팅 업무를 ○○전자에서 하는 ○○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비슷한 듯 하지만 꽤 다르다. 전자는 조직을 중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포지셔닝했다면 후자는 업무를 기준으로 정체성을 규정한다. 이 단계까지만 간다고 해도 자신을 회사와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다음 단계는 ‘회사 업무’를 내가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픈 ‘업業’으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그냥 마케팅 업무가 아니라 ‘소비자에게 상품의 가치를 알리는 일’과 같은 식으로 자신의 업을 재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확장되면

‘A(내가 재정의한 업의 본질)를 하는데, 지금은 그것이 B(그 업의 구체적인 현재 형태)인 직업’

이라는 포맷이 나온다. 만약 패션 브랜드의 마케터라면 ‘소비자에게 상품의 가치를 알리는 일을 하는데 지금은 그 상품이 패션 의류인 마케터’라는 식으로 풀어쓸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처음 커리어를 시작할 때에는 ‘○○ 잡지의 피처 에디터’라고 생각했다. 그 후엔 ‘글을 쓰는데 그 글들을 ○○ 잡지에 싣는 글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콘텐트를 만드는데 글을 써서 콘텐트를 만들어 ○○ 잡지에 싣는 글쟁이’였다. 

앞부분의 ‘~하는데’라는 부분이 이제 나의 정체성이 된다. 이것은 회사나 업무의 변화에 휘말리지 않는 내 개인의 정체성으로 확장할 수 있다. 하다못해 이직하고 전직하고 부서를 옮겨 대표가 볼 사업 전략 보고서를 쓰는 업무를 하고 있어도 저런 정의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콘텐트를 만드는데 그 독자가 대표님인 글을 쓰는 글쟁이’ 같은 식으로 변용되는 것이다. 애초에 나의 정체성을 ‘콘텐트를 만드는 글쟁이’ 로 정의했으니 꼭 회사 일이 아니어도 그와 관련한 일을 끊임없이 찾아본다. 광고주에게 제안서를 쓰고 있다면 ‘콘텐트를 만드는데 그 독자가 광고주인 글쟁이’일 것이다.독자가 달라졌을 뿐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같다.

©애끼



정체성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니 한 인간의 정체성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더 쉽다. 기자를 하다가 이직을 몇 번 거쳐 어느 날 사업전략팀에 입사했을 때, 스스로를 ‘콘텐트를 만드는데 그 독자가 대표님인 글을 쓰는 글쟁이’라고 규정했다고 했었다. 하나 저 ‘글쟁이’라는 단어가 그냥 ‘박 과장’으로 바뀐다고 해서 나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건 아니다.


어차피 방점은 행동에 찍혀 있다. 내가 무엇을 하는가 하는.


콘텐트를 만드는 ‘글쟁이’ → ‘콘텐트를 만드는’ ○○○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기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면 내가 지금 어떤 직급에 있고 어떤 직무를 하고 있는가에 따라 정체성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부서 이동이 잦거나 이·전직을 하거나 할 때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면 좋다. 내가 지금 맡은 업무가 내가 원하는 ‘동사형’ 정체성에 맞는지 아닌지를 하나의 기준으로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터 : 애끼(@aggi.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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