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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록 Feb 20. 2019

내 인생의 KPI

새벽 2시, 어느 퇴근길

겨울비가 내린 날이었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발길에 차이는 플라타너스 잎이 지나온 한 해의 나날처럼 느껴지던 퇴근길. 퇴근길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는데 할 일은 사채 이자처럼 늘어갔다. 아예 4박 5일 치 속옷을 챙겨서 출근했다가 가까스로 마감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새벽 2시의 퇴근길이었다. 회사가 있던 서소문로 빌딩들에는 밤이면 낮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빌딩 아래 조그마한 필로티 밑에 노숙자들이 하나둘 모여 하룻밤 나기 위해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들은 박스를 뜯어 꼼꼼하게 바람막이를 만든 이, 때에 전 담요를 머리 끝까지 덮어쓴 이들이 서로가 서로의 바람을 막아주며 잠을 청하곤 했다.

©애끼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그는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 아래 노트 한 권을 펼쳐두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쓰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에게는 그날 자신의 하루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처럼 보였다. 글을 쓰고 있는 품새가 어쩌다 한 번 쓰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해오던 의식을 행하듯 바닥에 앉아 한 손에 노트를 든 채 쓰고 있는데도 흔들림이 없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누덕누덕한 옷차림에도 왠지 그의 행동만은 무척 정결하게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이 있다. 밑바닥 인생처럼 보일지라도 어떤 하루였든 그 엄혹한 하루를 살아낸 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남겨 기억할 것이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고 정리하는 이의 뒷모습에는 숭고함 같은 것이 있었다. 그가 누구였든 내가 어떤 이였든.

집에 돌아와 모처럼 일기장을 펼쳐보니 취업 후 1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백지로 비어 있었다. 스스로를 돌이켜보지 못한 내가 살아온 그 시간들이 과연 그의 삶보다 나을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에게 더 충실한 삶을 사는 이는 내가 아니라 그가 아니었을까.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그래서 충실한 삶이란 꽤나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나름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족하지 않게 여겨졌다. 한때 화제가 되었던 웹툰 원작의 드라마 〈미생>을 보다가 울컥한 적이 있다. 바로 워킹맘 선 차장의 대사. “우리를 위해 열심히 사는 건데… 우리가 피해를 보고 있어.” 맞벌이 부부로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이, 자신의 가족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타임 푸어로 살아가야 하는 서글픈 운명이다.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우리 모두는 시간이 없다.

그러다 누군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지금 연봉의 2배를 제안한다면 과연 받아들이게 될까 고민해봤다. ‘65세까지 정년 보장, 평균 임금 인상률 + @, 하는 일은 매일 아침 9시까지 하얀 골방으로 출근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얀 벽만 보고 앉아만 있다가 6시에 칼퇴근’. 이런 내용의 계약서에 사인하라고 한다면? 글쎄… 안 할 것 같다. 죽어서 묘비명에 ‘박 모 씨, 연봉 ○○억 받으며 흰 방에서 뒹굴다가 죽다’라고 쓰이는 인생이라니…. 그게 또 뭔가 싶다.

직장에서의 시간을 그저 ‘돈을 벌기 위해 때우는 시간’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참 서글퍼진다. 왜냐하면 그 시간들 또한 결국 내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고작 ‘박 모 씨의 30년 = ○○억 ○천만 원’으로 환산되는 인생이 되어버리다니. 그런 인생에는 안정도 있고 돈도 있고 타임 푸어도 아닌데 막상 ‘내’가 없다. 일 속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만족이나 자존감이 없다면 결국 인생의 일부분인 일을 뚝 잘라내어 고스란히 버리는 게 되어버린다. 내 인생에서 시간을 돈으로 환전하기 위해.


직장인의 도(道)

일은 삶과 떨어져 있지 않다. 살아가는 것에 나름의 준거가 필요하듯,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면서도 나름의 준거가 필요한 이유다. 남들처럼 살고 싶지는 않지만 남들만큼은 살고 싶은 속내. 그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이중의 함정 안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언제부터인가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지만 정작 그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삶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의 소외 끝에 결국 노동에 대한 만족감을 월급이라는 형태로만 느끼게 되었나 보다. ‘32평, 50평짜리 아파트’는 어쩌면 노동의 소외에 대한 대가로 우리가 택한 대체물일지도 모르겠다.

직장인이라는 노동자가 생산도구를 소유할 수 없는 시대, 그 한계를 인정한다 해도 우리가 직장 내에서 여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있게 마련이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만족감, 그리고 그 조직 내에서의 인간관계. 어쩌면 아파트 한 채를 갖기보다 힘든 게 어디 가서 괜찮은 팀장, 괜찮은 상사, 괜찮은 선배라는 소리를 듣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때론 한 인간이 그저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산사에서 수행을 하듯 우리는 직장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장자 <도척편>에 이르기를 도둑에게도 道가 있다고 한다.. 도척은 수하에 9000명의 도둑을 거느렸던 노나라 시대의 대도大盜인데, 그가 도둑의 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파했다고 한다.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것이 성聖이며,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을 용勇이라 한다. 남보다 늦게 나오는 것이 의義이며,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되는가 그 때를 판단하는 것이 곧 지智이다. 또한 도둑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바로 인仁이다."

이렇듯 도둑에게도 도가 있으니, 직장인에게도 도道 하나 정도 있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닐 터다. 

“모두가 기피하는 일을 먼저 맡는 것이 성聖이며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아니요’라고 말할 줄 아는 것을 용勇이라 한다. 함께 일하는 이들을 귀천 없이 대하는 것이 의義이며 때와 장소에 맞게 보고할 줄 아는 것이 지智다. 또 실패한 원인을 남에게 돌리지 않고 성과를 고르게 나누는 것을 인仁이라 한다.” 

이렇게 내 나름의 도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뭐라도 좋으니 자기 업業을 행함에 있어 마음속에 도 하나쯤 갖춘 이라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함께하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애끼


시간을 아껴서 무엇에 쓸까

어느 봄날 오후, 분주한 미팅 사이에 마침 시간이 비어 카페에 앉아 모처럼 일이 아닌 다른 것들을 생각해봤다. ‘왜 하늘은 파랄까’, ‘아, 저 재즈 음악은 누구의 것일까’, ‘저기 지나가는 엄마와 아이는 참 다정해 보이는구나’ 등등 바쁠 때는 해볼 엄두조차 못 냈을 실없는 생각이다. 그러다가 오랜 시간 놓치고 있던 질문이 떠올랐다. 항상 고민하던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시간 관리를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보다 더 중요한 질문.


시간을 아껴서 무엇에 사용할 건가?’


시간을 아껴 쓰는 건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효율성에 집착한다면 결국 남을 따라 하는, 속도전의 경쟁 대열에 생각 없이 한 발 들여놓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어디로 갈 것인지 생각도 안 하고 빨리 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과 매한가지다.

도구적 합리성의 일상화다. 그나마 즐길 수 있는 틈새의 ‘현재’조차 조급하게 흘려보내는 주제에 정작 자신은 시간 관리를 잘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말 한심하다. 그렇게 산다면 아무리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해도 정작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 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그 시간 그대로 즐길 줄 아는 것, 그 시간들도 내가 살아가는 삶의 퇴적층 같은 것이라면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하지 않을까? 효율성에 대한 강박을 덜어내고 아주 잠깐 주변을 둘러보는 것. 때론 그런 시간이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줄지도 모를 일이다.

회사는 물론 중요하다. 밥벌이가 걸려 있으니까.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그 업을 통해서 내 가족을 부양하고 이 사회에서 자신의 쓰임을 찾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직장인職場人'으로서의 정체성은 언제나 ‘직장職場’이 아니라 ‘인人’에 방점이 찍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자아로서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진다면, 회사라는 부족 안에서 나의 업을 이어가기 힘들다 느껴진다면, 혹은 회사형 정체성이 나의 모든 것을 잠식하려 든다면 그런 순간들에 탈출 버튼이 필요하다. 회사라는 거인은 함께 살아가기에 유익한 존재지만 때론 그들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애끼

프롤로그에서 얘기한 ‘최종 병기, 사표’란 그런 의미다. 자아를 회사라는 거인으로부터 지켜줄 마지막 병기. 잊지 말자. 우리는 회사를 ‘다니는’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함께한다는 의미다. 회사라는 부족에 속할지라도 언제나 ‘나’라는 개체 그대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직장인’이기에 앞서 직장이라는 곳에서 자신의 실존을 행해야 하는 한 개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온전한 나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내 인생의 KPI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20회 차를 마지막으로 <희망 퇴사>의 '브런치 위클리 매거진' 연재는 마무리가 됩니다. 그동안 아껴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리며, 바쁜 일상과 직장 생활 속에서도 모두 건강한 '나'로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일러스트레이터 : 애끼(@aggi.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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