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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록 Jan 23. 2019

"위에서 시키면" 해야 할까?

회사가 들려주는 신화 3편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 나의 이익과 부서의 이익, 부서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 혹은 회사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상충하는 순간. 미시적으로 보면 나와 동료, 나와 상사, 그리고 나와 사회의 이익이 상충하기도 한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그 일상의 순간 속에서 이런 이익들의 우선순위는 꽤 단순한 논리로 정리되기 일쑤다. 토론이나 회의 같은 프로세스를 거치지도, 도덕적 준칙에 의거하지도 않는다. 

위에서 시켜서…


라는 이 한마디로 참 많은 일이 합리화되고 정당화된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한 조직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위계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선임자와 리더는 분명 더 나은 연륜과 경험을 갖추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더 많은 권한으로 많은 문제를 정리하고 해결할 수 있다. 적절한 지시가 내려진다면,  그 지시를 성실히 그리고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회사라는 조직이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신진대사에 가깝다.

그러나 모든 업무 수행이 단지 ‘위에서 시켜서’라는 이유로 이루어진다면 그런 조직은 체계적이거나 컨트롤 타워가 잘 갖춰졌다기보다는 죽어 있는 조직일 가능성이 높다. 상사에게 ‘No’라고 말할 수 없는 문화, 상사가 시키면 실질적인 성과나 효율성과 무관하게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문화, 회의라고 부르만 알고 보면 그냥 훈계나 보고인 문화…. 그런 문화에서는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고 상사나 리더라고 해서 항상 옳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애끼

‘위에서 시켜서’라는 변명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흔히 말한다,“위에서 시켜서요”. 상사에게서 업무 지시를 받았고, 또 자신이 그 정도 범위의 책임을 질 만한 권한이 없는 경우라면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솔직히 얘기해보자. 우리는 때론 ‘위에서 시켜서’라는 말을 통해 그 뒤로 숨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을 위한 변명 혹은 핑계로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때로는 '위에서 시켜서' 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위에서 시킨 대로 하는 것이 ‘나에게 부담이 없기 때문에’ 한 것이다. 일이 잘못되어도 핑계를 댈 수 있고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으니까. 선택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어놓으면 만약 실패하더라도 자신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혹은 위에서 시킨 대로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한다. 위에서 시킨 대로 하면 자신의 업무가 줄어들거나 추가 업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그렇다.

물론 이게 꼭 나쁘다고 볼 수도, 꼭 일하는 이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을 당연시하고, 때로는 바람직하다고까지 생각하는 우리의 조직 문화에서 상사에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그리고 윗사람들조차 제대로 고민하지 않는 것,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면 자기가 책임질 일은 만들지 않으면서 조용히 직장 생활을 하는 게 생활인의 관점에서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닌 권한과 책임 안에서, 또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여지 안에서 어떤 사건의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고 행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판단의 틀은 꼭 회사나 조직 안에서만 행해져서도 안된다.  그런 판단을 유보하는 순간, ‘위에서 시켜서’가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되는 순간 ‘악의 평범성’이 우리 업무와 일상에 끼어든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위에서 시켜서 했습니다.”

멀리는 나치의 전범부터, 가까이는 국정 농단의 주범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말했다.


위에서 시킨 것을 그들은 열심히 수첩에 적어가며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방향이 잘못된 성실함은 이처럼 독이 된다. 그리고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누군가의 '아돌프 아이히만'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자신의 커리어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중에 문제가 되었을 때 ‘위에 있는 그(녀)’가 다치기 전에 실무자가 먼저 다치는 경우가 더 많다. 대마불사(大馬不死 ) 법칙은 회사에도 있다. 윗선의 잘못은 내외부에서 이슈가 될 가능성이 크기에 결국 꼬리만 자르는 경우가 생겨난다.

©애끼


위에서 시키지 않았어도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잠을 자고 있어서 보고를 늦게 받는 바람에 사태가 커졌다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전 대통령이 제시간에 보고를 받았다고 해서 그 비극이 해결되었을까 의문이 남는다. 그 당시 구조 업무를 해야 할 조직은 그럴 역량이 있었을까?

제대로 된 조직이라면 상사나 리더의 부재 시에도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과 매뉴얼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제각각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의 책임하에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의지가 있어야 한다. 사실 전 대통령이 비난받아야 하는 점은 보고를 늦게 받아서가 아니라, 리더로서 제대로 된 시스템과 조직 문화를 만들어놓지 못했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휘하의 직원들은 비판을 피할 수 있을까? 그들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책임을 방기한 죄에 대한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참사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국가안보실은 구조 업무는 자신들의 업역이 아니라며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에만 급급했다. 아이들을 구조해야 하는 해경은 청와대 ‘보고 자료’를 만드느라 구조할 시간을 놓치고 있다고 토로할 지경이었다. 나중에 상황 파악과 보고도 주무 비서관실이 아니라 전직 고위급 해경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엉뚱한 비서관실에서 진행했다. 국가적 대참사가 벌어지는 동안 이루어진 황당한 대응 과정을 보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가 너무도 명백히 보인다.

서글픈 것은 당시의 황당한 대응 과정이 낯설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들 직장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모양새와 무척 닮아 있기 때문이다. 서로 책임지지 않기 위해 업역을 다투고, 일을 하기보다는 보고에 급급하고, 보고 준비를 하느라 정작 실무는 하지도 못해 일을 더 키우고, 이 와중에 R&R도 무너져 ‘할 줄 아는 애가 해봐’라는 식의 시스템 붕괴에 이르기까지.


‘위에서 시켜서’라는 이유로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과 이에 따른 책임을 위로 넘긴다는 뜻이다. 아니, 심지어 그 책임을 위에 다 떠넘길 수도 없다. 스스로 보기에 옳지 않은 일이나 무의미한 일을 위에서 시켜서 하는 삶이 행복할 리 없다. 반대로, 위에서 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직장인職場人’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규칙적으로 직장을 다니면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이 사전적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결국 ‘사람’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선택하고 움직여야 한다. 직장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직장인’이란 결국 ‘회사 생활’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실존을 고민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인간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 고민을 하는 준거의 기준은 부서나 회사의 틀을 넘어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럴 수도 있다. (@애끼)

일러스트레이터 : 애끼(@aggi.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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