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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록 Dec 26. 2018

어떤 행간 : 악마의 회사어 사전

회사관찰기 5편 


지난 회차에서는 '회사'라는 곳에서 과장되는 각종 등신체들을 살펴봤었다. 하지만, 오피스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런 '등신체'만 있는 건 아니다. 그 말들의 표면적인 의미와 정작 그 말들이 활용되는 배경 사이에 큰 간극이 있는 경우가 적지 않기에, 행간을 읽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조금은 위악적인 해석을 가미한 점은 양념으로 봐주시길~


<일상 편> 

○○에 대해 회의합시다. → 나는 ○○에 대해 별 생각이 없지만, 그래도 네 의견이 궁금하네요.

이 건은 제가 김 과장과 공유해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 이 건은 이제부터 김 과장이 할 거지만, 그래도 제가 주도적으로 하는 척하며 숟가락 얹겠습니다.

이 제안은 ○○팀과 협업해 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이 제안은 이제부터 ○○팀에서 진행할 건데, 잘되면 제가 잘한 거고 잘못되면 ○○팀에서 못해서 그런 겁니다.

추후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러니까 다시 말씀하실 때까지는 가만히 있겠습니다.

다들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 내가 딱히 뭘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다들 알아서 잘하렴.

매출 목표는 보수적으로 산출해보았습니다. → 달성 못하면 안 되니까 일부러 적게 잡았습니다.

좀 더 어그레시브하게 접근해보세요. → 까라면 까야 할 거 아냐?

제가 그런 관점에서 챌린지하는 거 아시죠? → 웅, 그냥 니가 하는 꼴이 맘에 안 들어서 까는 거야.

대표님 관심 사항입니다. → 목숨 걸고 하세요.

©애끼

<채용 공고 편>

자사는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인재를 원합니다. → 왜냐하면 지금 우리 회사에는 그런 사람이 없거든요.

직원들의 취미 생활 및 교양 활동을 권장하기 위한 동호회 지원 → 흐음, 할 시간 없을 텐데.

OOO 우대 → 우리 회사에 그거 할 줄 아는 사람 없음. 너님 오면 독박.

커피 및 간식 스탠드 → "여러분이 과자 사러 나가는 시간도 아깝습니다.


<프리랜서 편> 

저희와 한두 번 일하실 거 아니잖아요. → 싸게 해줘.

레퍼런스 삼아 한다고 생각하고 같이하시죠. → 싸게 해줘.

전문가이시니까 이런 건 금방 하시지 않아요? → 그니까, 싸게 해줘.


참조와 수신의 정치학 

언어가 오가는 것은 말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오피스에서 조심해야 할 것 들 중 또 하나는 이메일이다. 기자일을 할 때 제일 많이 받는 메일은 보도 자료였다. 그다지 다른 부서에 메일을 쓸 일도 없고 대부분 혼자 하는 일이라 메일을 보내도 수신자만 정확히 지정해서 보내는 게 대부분이었다. 사실 왜 이메일에 ‘참조’라는 칸이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대기업에 들어가고 나니, 온갖 메일들에 참조가 걸려서 와 있었다. 처음에는 왜 나와 상관없는 메일이 주야장천 참조가 걸려서 오는지 몰랐다. 그러다 어느 날 깨달았다.


나 : “어, 그 얘기는 지금 제가 처음 듣는 건데요.”

모 과장 : “(아웃룩을 검색하더니) 어, 그거 한 달 전에 메일 보낼 때 참조되어 있었는데요.”

나 : "@_@"

©애끼

한 달 전에는 그 업무가 아직 나와는 전혀 무관하던 시점이었다. 그냥 온 회사 사람들에게 다 참조가 되어 있길래, 그렇지 않아도 왜 저렇게 메일을 보내나 싶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오피스 메일은 모든 것을 문서화하는 21세기 버전의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웬만하면 참조와 수신에 모든 이를 걸어놓는 세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아웃룩을 보고 있자면 메일이 아니라 메신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는 다들 뭔가 문제만 생기면 일단 메일부터 검색했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야 하니까. 


사람들이 메일을 쓰는 이유를 그때 깨달았다. 대략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일을 하기 위해서, 업무를 공유하기 위해서 21.7%

답장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9.6%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36.5%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쓰고 ‘일을 떠넘기려고’라고 읽는다) 18.6%

'내가 일을 안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남기기 위해서 14.9%

‘이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잘못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 24.7%

총합이 100%가 넘는 이유는 한 가지 이유로만 메일을 보내는 게 아니라 하나의 메일에 여러 가지 이유가 중복적이고 복합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회사의 말들은 그렇게 오간다. 그리고 그 행위들 하나하나가 때로는 명시적인 의미보다 더 많은 것을 내포하기도 한다.



일러스트레이터 : 애끼(@aggi.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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