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한 화두
그렇다. 삶에 답이 없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종종 어딘가로 떠난다. 누군가는 인도로 자아를 찾으러 가고, 누군가는 산티아고의 순례길로 표표히 떠날지도 모르겠다. 허나, 젖은 낙엽마냥 붙어 있어야 한 해라도 회사를 더 다닐 수 있는 40대 중후반의 K-직장인에게 그런 낭만은 없지 게다가 “모처럼 들어간 대기업, 얌전히 좀 다녀라”는 간곡한 모친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는 박 모씨의 선택지에는 그런 게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사람이 염치라는 게 있다. ‘이혼’이라는 불효를 저질렀으면, 뭐라도 하나 부모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늦여름, 점심을 먹으러 나섰지만 딱히 입맛이 없다. 하릴없는 발길이 어쩌다 보니 회사 근처의 조계사로 향했다. 광화문 근처의 회사를 다닌 지는 꽤 되었지만, 부처님오신날이 있는 5월에나 한두 번 와봤을 뿐인데, 그날 따라 그랬다. 딱히 불교 신자인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날 따라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참선 입문 과정>
자세히 살펴보니 선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실제 초심자를 위한 좌선수행까지 10주 코스로 진행하는 과정이었다.
“참선의 진정한 가치는 나를 찾는 것이며 바로 내 마음의 성품을 바로 보아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역력하게 살아 있는 나, 한없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나의 본성을 바로 이 자리에서 찾는 것이 참선입니다.참선입문과정을 통하여 착각과 망상을 벗어 나는 본래 부처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흐음... 과연 나란 인간도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저 설명보다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근처 골목길에 청년부에서 내건 배너였다.
“야!너두 부처 될 수 있어!”
뭔가 패기 넘치고 매력적이다. 저 10주의 입문 과정을 듣고 나면 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러니까 이거슨 <단기 속성 10주 붓다 코스>인 셈이다. 왠지 중생을 대오케 하는 대치동 일타강사 출신 스님께서 ‘팔정도’와 ‘연기법’, ‘무아’에 대하여 개념 원리부터 응용까지 가르쳐줄 거 같은 기분. 하긴 부처님도 요즘 세상에 태어났으면, 유튜브 채널 하나 정도는 파시지 않았을까.
“고행하지 마세요. 숨만 잘 쉬어도 해탈합니다.”
“왕자 때려치운 그 남자, 알고보니 헉"
“해탈 A to Z. 이 한편으로 정리합니다.”
“Meditate with me, 명상이 필요할 때”
아마 저런 걸 보다 보면 알고리즘에 예수님 영상도 같이 뜨겠지.
“성전에서 깽판 친 썰 품”
“와인업계 난리 났어요. 생수로 와인 만드는 법 대공개”
“오병이어, 어렵지 않아요! 5천명 나눠 먹는 꿀팁”
“왜 물에 빠지는 거죠? 이렇게 걸어보세요.”
아마도 댓망진창이겠지.
님, 금수저면서 왜 없는 척함?
저거 내가 해봤는데 안 됨, 주작임
오늘도 슈퍼챗 쏘고 갑니다.
뭐 이런 저런 잡스러운 생각을 하면서도 괜히 해보고 싶었다. 참선이라는 것. 예전부터 명상에 관심이 있었으니, 한 번 해보면 좋지 않을까.
등록을 하고도 2개월 즈음이 지나서여 입문 과정이 시작되었다. 첫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스님의 언변이 예사롭지 않다. 수업은 ‘선이란 무엇인가’를 옛 선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려주며 틈틈이 참선을 하는 두 시간의 과정이, 일주일에 한 번씩 10주간 이어지졌다. 매주 선 수행의 마음자세, 수행의 조건, 간화선, 화두수행 등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반가부좌 하나도 인도에서는 오른쪽 다리를 위로 올리고, 중국에서는 왼쪽 다리를 위에 올린단다. 수인을 하고 혀는 윗니의 잇몸에 닿게. 그렇게 해야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나지 않아서 도반들에게 민폐가 되니 않는단다. 눈은 감은 것도 아니고 뜬 것도 아니게 살포시 뜨고 아래 15도를 향해서, 대충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방석 끝을 보는 정도. 눈을 뜨고 있으면 집중이 안 되고,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칠흑 속에서 또 어떤 마가 끼어들지 모르기에 딱 그 정도만 뜨고 있을 것. 불상으로 만들어진 부처님의 눈이 그렇게 반쯤 졸린 듯이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종교 생활 같은 거랑 담을 쌓고 살아서, 꽤나 지루할 지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매주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런 말이 좀 외람될 수 있지만, 뭐랄까 불교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러 가는 느낌이었다. 그냥 재미있었다.
참선의 정의는 ‘사유를 이용해 수행의 도구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 스님께서는 ‘생각과 사유는 또 다르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생각을 하되 사유를 하지 않는다고. 느낌적 느낌으로는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 그래도 사전적 의미를 한 번 살펴보았다.
생각 :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사유 :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
기실 별 차이가 없다. 하긴 이런 단어를 찾아서, 그 단어의 논리를 이어간다고 찾아지는 게 애초의 불교의 진리가 아니지 않던가
그냥 일상적으로 생각해보면 안다. 머리 속에 온갖 생각들이 들쑤시고 드나들지만, 하루가 지나보면 무언가 남아 있는 것들이 없다. 어떤 내 사고의 결정체가 소금 한 톨만큼의 크기라도 남아 있다고 여겨지는 날이 과연 1년에 몇 일이나 있을까.
참선을 한답시고 가만히 앉아 있어 보면 안다. 10분만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얼마나 힘든 건지. 입안에 침이 고이고, 갑자기 등이 간지럽다. 평소라면 무의식적으로 쓱쓱 긁고서 잊어버릴 일을 참선이라는 자세로 가만히 있다 보면 그게 참 보통 간지러움이 아니다. 고승들께서는 밥 먹고 자고 싸는 시간만 빼고선 어떨 때는 이런 걸 하루에 18시간씩 한다고 하니, 그냥 그것만으로도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주 1회 두 시간 정도 바닥에 좌정을 하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하는 중생이 보기에 그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다. 2시간 내내 참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가끔은 주문처럼 “나는 누구인가?”를 외워보라고 하신다. 어떤 날은 살면서 잘해본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하고, 어떤 날은 잘못한 것들을 생각해보라고 하신다. 어떤 날은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어떤 날은 미안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라고도 하신다. 그럴 때마다 생각의 타래들이 얼키고 설켜들었다.
무언가에 집중을 하라는 건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있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또 간화선이라는 것은 그렇게 무언가를 집중해서 논리적으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한 순간에 깨우치는 것이라고도 하신다. 들으면 들을수록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또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도 하신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다 떠나서 한 가지만은 명확했다. 소위 말하는 나의 생각이라는 것, 그것이 한순간도 얌전히 있지 않더라는 것. 여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어느 생각은 다른 곳으로 흐른다.
‘다리 아파’, ‘졸려’, ‘배고픈데…’ 이런 1차원적인 잡생각에서부터 미처 마치지 못한 회사일이 떠오르며‘내일 회사 가기 싫다’ 같은 현실도피의 욕구, 그러다가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해보겠다며 또 머리를 굴린다. 처음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내가 참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그냥 그런 것이다. 인간이라는 게 애초에 그런 것이다. 생각이라는 건 그렇게 바닷가에 앉아서 파도가 오가는 것 마냥 오르고 내리고 하는 것. 가만히 지켜보는 느낌. 지금까지는 그 파도 위에서 부표처럼 오르락 내리락 이리저리 흘러가고 있었던 거 같았는데, 어느 새 한 발자국 떨어져 있다.
10주간의 참선입문 과정을 끝내고 받은 화두가 ‘이 뭐꼬?’ 였다. “이 뭐꼬?”는 대체 뭐꼬? 찾아보니 1700개의 화두(공안) 중에서 가장 근원이 되는 화두라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사들이 제자들에게 가장 많이 내려주는 화두라고 한다.
생각이나 오감(육근)을 따라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이 뭐꼬?”라고 의심하고, 그 생각이나 현상이 일어나는 근원을 끊임없이 고민해 보라는 뜻이란다. 그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또 무엇인지 의심해보라는 뜻이기도 하단다.
그렇게 화두를 ‘들고’ 있으라고 한다. 화두는 푸는 것이 아니라 ‘들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 요가 수업에서 ‘호흡을 어디로 보내보세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황당하다.
무엇이든 논리에 따라 생각하는 것에 익숙한 나의 뇌는 종잡을 수가 없다. 일단은 그렇다. 그런 걸로 알기로 했다. 결국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으라는 것이겠지. 불현듯 깨달으라 하지만, 그게 되면 내가 이미 중생이 아닐 것이다.
그냥 그래서 내용도 좀 바꾸었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이것이 내가 정한 나의 화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