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면 '나'
살면서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들은 그런 순간들이다.
너무 익숙해서,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 것들에 대해서, 막상 한 꺼풀만 벗겨 봐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들.
뭐, 사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세상의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기는 하다. 엔진의 구조를 알아서 차를 운전하는 것도 아니고, 공기 역학을 알아서 자전거를 탈 줄 아는 것도 아니다. 내 폐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도 잘만 숨 쉬고 살았고, 대뇌피질의 뉴런을 만나본 적 없지만 대충 이래저래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막상 작정하고 한 번 알아보자라고 맘을 먹으면 항상 그렇다. ‘이렇게까지 암것도 모르고 잘도 살아왔구나’ 싶어진다. 그런데 하필 그 주제가 ‘나’라니.
기억상실증 환자도 아니고 대체 ‘나는 누구인가’를 이제 와서 소리쳐 불러야 하다니. 갑자기, 아주 오래전 보았던 성룡의 영화가 떠올랐다. 아프리카 어딘가에 떨어져 기억을 잃은 성룡이 ‘Who am I?’를 외치던 장면. 그렇게 외치다가 성룡을 발견한 원주민들 성룡을 ‘Who am I’라고 불러주던 영화. 내 성이 이 씨였음을 이름을 ‘이 뭐꼬’로 개명이라도 했을 텐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 그럴 때는 요즘 들어 핫한 업무 방식을 차용해 보자. AI에게 물어보기.
챗GPT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보았다. 역시 답은 잘한다, 멋진 내 친구.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다루어지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각 개인의 경험, 배경, 가치관 등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아래에 다양한 관점에서 이 질문을 탐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철학적 관점, 심리학적 관점, 사회학적 관점, 문화적 관점으로 크게 나누더니 또 이걸 세부적으로 나눈다.
1. 철학적 관점 : 존재론적 관점, 현상학적 관점, 실존주의적 관점
2. 심리학적 관점 : 정신분석학적 관점, 인지심리학적 관점, 인본주의적 관점
3. 사회학적 관점 : 사회적 역할 이론, 상징적 상호작용 이론, 구조적 기능주의 이론
4. 문화적 관점 : 문화적 정체성, 언어와 자아, 전통과 신념
데카르트에서 시작하여 에드문드 후설과 사르트르를 거쳐 프로이트를 섭렵하고 조지 허버트 미드와 칼 로저스에 이르는 이 박학다식함이라니. 멋진 신세계다. 나는 대체 그동안 책 따위를 왜 읽은 것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열패감은 그런 게 아니다. 그렇다. 나란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를 AI에게 묻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AI가 아무리 박학다식하고 지식으로 가득 차도, 이 녀석이 나에게 ‘나는 누구인지’를 알려줄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다. 아무리 나에 대한 데이터학습을 시킨 들 그렇게 해서 찾아낸 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식 따위가 인간을 바꾸려면 결국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것은 질문의 영역이고, 비록 지식의 영역에서 시작하더라도 결국은 스스로 깨닫고 체득하지 못하면 소용없는 길일테다. 그렇다, 붓다와 예수(그리고 챗GPT)가 생선의 가시를 발라내어 밥숟가락 위에 얹어줘도 먹고 소화시키는 건 알아서 해야 하는 일ㅇ이다.
대한민국의 교육 체계를 모범생으로 살아오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모든 문제는 의도가 있다. 그렇다 출제자의 의도다. 편법이지만, 이번 문제는 기출문제를 내 마음대로 바꿨으니 내가 유리한 입장이다. 물론, 바꾸면서 별생각 없이 바꾼 지라 바꾸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게 문제랄까. 그러니 지금이라고 문제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내 마음대로 비틀었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이 뭐꼬?’와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왜 이 모양인가’는 엄연히 다른 문제다. 기출 변형도 아니고, 수험생이 제멋대로 문제를 쉽게 바꾼 것이라고 야단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년 꼴찌하던 녀석이 처음으로 문제집 펼치고서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만으로도 칭찬받을만한 일이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것이다. 그렇다. 우리 붓타는 그런 쪼잔한 스승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있다. 그냥 대충 질렀지만 써놓고 보니 “나는 왜 이 모양인가?’는 뭔가 좀 더 현실적이고 와닿는 느낌이 있다. 생각 없이 바꾼 것을 반성하는 의미로 있어 보이게 한 번 풀어보자.
1. ‘나’라는 존재의 현재 상태와 병리적 현상에 대한 진단 : 일단 현존재의 상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담겨 있다. 그리고 자기 신세에 대한 적절한 한탄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서 일상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도 높이 평가할 만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 아부지가 나를 가리키며 “절마 저거는 와 저 모양이고?”라고 할 때의 딱 그 느낌.
2. ‘나’라는 존재의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틀에 대한 의문 : 현존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틀, 그리고 그 틀의 구축 과정, 그리고 그 안에서의 기능적인 분석에 대한 질문이다. “저 차는 왜 저 모양인가?”라고 질문을 바꿔보면 알 수 있다. 왜 바퀴가 네 개이고, 엔진은 몇 기통이며, 디자인은 레트로 등등. 즉 ‘자동차’라는 것의 컨셉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그에 맞게 잘 만들었는지 등등을 알아보듯 나라는 ‘인간’의 틀에 대해 고민하고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잘못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뭔지 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뭔가 거창한 듯 적어놓고는 스스로 뿌듯해한다. 저렇게 써놓고 보니 뭔가 일생을 걸어서라도 풀어내어야 할 엄청난 문제를 발견한 것 같다. 그래, 그래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