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중독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나에게 닥친 사건은 어쩌면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이다. 인생에서 그 정도의 큰 사건은 그냥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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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들어보았을 법칙 중에 ‘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같은 원인으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번의 징후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통계적 법칙이다.
그런 사건은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고, 적어도 나의 일상에는 그와 비슷한 수많은 갈등과 반목이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뭐랄까, 일종의 엉망진창.
남들 보기에는 멀쩡하게 잘 사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스스로는 안다. 하다못해 당장 겉으로 드러나는 갈등이 없고 (그것도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상대가, 남들이 참아주고 인내해서인 경우가 더 많지만), 사회적으로 직장 생활 잘하고 어디 가서 사회성 떨어지지 않게 살고 있으면, 남들은 잘 사나 보다 한다.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는 안다.
그러니 어쩌면 한량한 헛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고백해 본다. 살아오는 내내 내가 ‘나’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일종의 난치병처럼 느껴졌다. 일종의 자기혐오냐라고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물론 전혀 없지는 않겠지. 자의식 과잉인가, 그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나름의 자기 효능감과 자신감을 지닌 채 살아가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들이 한 두개가 아니다. 뭐랄까, 내가 ‘나’라는 존재와 친하지 않다는 어떤 느낌 같은 것이다.
알게 모르게 욱하고, 어느 순간에는 문제를 회피하고, 그렇게 상대를 지치게 한다. 남들을 생각해주는 것 같지만, 생색은 내고 싶고, 솔직함과 직설적인 성격을 핑계삼아 하지 않아도 될 말들로 상처를 준다. 그리고 나선 말하지. “난 원래 그래, 난 원래 이런 성격이야.”
고치고 싶고 바꾸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쉽사리 되지 않는다. 내가 ‘나’라는 행동 패턴과 습관에 익숙해져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에도 특정한 행동이나, 그에 앞서 감정들이 생겨난다. 어째보면 흡연 같은 중독일지도 모르겠다. 나쁜 점을 알고 끊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손길이 간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고 반응하려 하여도, 어느 새 나는 알게 모르게 '나'로서 움직이고 있다. 어느 새 나는 나에게 ‘중독’되어 다른 사고와 행동의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자아’라는 것에 대한 중독, 아 이것이 소위 말하는 그 지독한 ‘에고’라는 것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순간들에 할 수 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다. 변명이 아니다. 의외로 정말, 많지 않다. 내가 ‘나를 잘 통제하고 있다’라는 느낌은 어쩌면 허상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슨 사이코패스이거나 분노조절장애라서 그런 게 아니라(아니 뭐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아닌가, 나만 그런가?)
그러니까 무언가 이미 세팅이 끝나버린 일종의 블랙박스 혹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수식으로 짜여진 함수 같은 느낌이랄까. 그 안의 알고리즘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A를 넣으면 Z라는 결과값이 나오는데, 또 다른 어떤 이에게서는 a가 나온다. 그 결과값들이 주변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긍정적이고 선한 값들이라면 다행일텐데, 그렇지가 않을 때가 있다.
‘나’라는 함수에 어떤 숫자를 넣으면 어떤 결과치가 나왔다. 그런데 그 결과값이라는 게 너무 뻔했다. 짜증이나 화를 내고 있다. 무관심하거나 무뚝뚝하게 군다. 무슨 값을 넣어도 결과치가 부정적인 음수로 나오는 느낌.
언제나 그렇듯 ‘패턴’이라는 게 있다는 거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냥 일종의 시스템일 뿐이다. 하지만, 그 시스템에 이상이 있어서 언제나 부정적인 결과값만 나온다면 그건 문제가 있다. 잔뜩 꼬여버린 ‘사고 패턴’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면 스스로도 피곤할 수 밖에. 그렇다면 이 함수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게 틀림없다. 방정식을 뜯어고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이 틀려먹은 수식이 나의 뇌 한군데 자리 잡고 있는 게다.
이 몸뚱어리와 이 정신머리를 가지고 한평생을 살아왔지만, 정작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감정을 느끼고, 어떻게 의식이라는 걸 가지고서 어떻게 생각이라는 걸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항상 모니터의 즐겨찾기 아이콘 몇 개만 클릭하며 컴퓨터를 써 온 느낌이다. 분명 다른 프로그램들이 있을텐데, 새롭게 이 머리 속의 소스코드를 짜는 법이 있을지도 모를텐데, 그냥 어느 새 익숙해진 사고 패턴, 행동 패턴을 조건 반사처럼 반복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게다가 혹시라도 운좋게 신형 맥북 정도의 사양인데도, 제대로 못 써먹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라는 것은 꽤나 익숙한 것이고, 결국 ‘자신’이라는 하나의 패턴 안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나'라는 인간은 그저 지금 이런 모습의 '나'에 익숙해져 있는지 모르겠다. 누구나 어떤 사고의 패턴, 감정의 패턴을 가진다. 외부의 어떤 상황, 누군가의 행동에 의해 촉발되는 하나의 트리거. 문제는 똑 같은 트리거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 나는 스스로가 일종의 고도화된 ‘파블로프의 개’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나'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병적인 징후였다. 이렇게 같은 의식과 감정의 패턴을 반복하며 사는 것은 결국 내가 만들어 둔 '자아'에 중독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자아중독이라는 질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