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하고 엄청 글을 쓸 것처럼 마음을 먹었는데, 정작 쓴 게 없다. 아니다, 쓴 건 많다. 다만 발행 버튼을 누루지 못했을 뿐이다. 소소하지만, 낯선 두려움 같은 게 뒤늦게 찾아왔다.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선택의 연속이다. 해서 글을 쓰는 이는 끊임없이 길을 잃는다.‘바라다’와 ‘원하다’ 사이에서 길을 잃고, ‘서글프다’와 ‘슬프다’ 사이에서 가만히 주저 앉는다. ‘기약없다’와 ‘그립다' 사이에서 할 말을 잃고, ‘사랑한다'와 ‘미워하다' 사이에서 멍해진다.
한동안은 그렇게 길을 잃고는 어디 굴 안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무디고 성글어져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막상 써보려니 턱턱 걸렸다.
어디 글만 그럴까.
마음도, 나도 그렇다. 쓰지 않았더니, 무뎌진다. 뻔히 보이는 누군가의 마음들도, 그냥 놓아둔다. 지켜봐주는 것이라면 좋을텐데, 일종의 방치다.
나 또한 가만히 놓아둔다. 가만히 놓아두는 나는 그렇게 가만히 놓여진다. 나를 놓아두는 것이 나이니 이것은 조금은 자유로운 건지도 모르겠다.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것도 방치다.
써야지써야지 하며 앉아 있으니 글들은 쌓여간다. 그런데 이게 다 된 글인지, 되다 만 글인지, 다 되었다고 우기고 싶은 글인지, 되다 말았는데 더 쓰기가 싫어진 건지 쓰면서도 모르겠다.
다 된 거 같은데도 차마 내놓지 못하고 만지작만지작 거린다. 이건 사진을 하나 더 찾아야겠어, 이건 이미지를 하나 만들어야겠어, 이건 자료가 부족한 거 같아, 관련 책을 3권은 더 읽어봐야겠어. 뭐 그러면서 핑계를 만든다.
안 쓰다 보니 못 쓰게 된 건지, 안 쓰다 보니 겁이 많아진 건지.그렇게나 쓱쓱 써대던 글들인데, 새삼 뭐가 그렇게 글 한 편 발행버튼 누르기가 겁났다.
글을 쓰지 않는 내내, 어떤 동굴 안에 있는 느낌이었다.
평온한데 무의미하다. 무의미하니 나태하다.그렇게 있어보니 뒤늦게 깨닫는다.
글이라는 게, 말이라는 게 그렇게 툭툭 나와서는 안 되는 거였다는 걸.
누구 하나 듣는 사람 없고, 누구 하나 읽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글을 쓰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세상의 차고 넘치는 말과 글들 속에서, 나의 말과 글이 어떤 오염을 더하게 되는 건 아닐지, 그 글과 말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금이나마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이긴 한 건지. 괜한 생각들이 많아지니, 또 겁이 많아졌다.
자료를 찾는 이유는 당신들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싶어서다. 그럴 만한 타당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고 싶어서다. 찾은 자료는 정작 10분의 1도 원고에 활용하지 않는다. 그래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모니터 앞에 앉으면 문장을 밀고 나가는 힘이 떨어지면서 스스로 부끄러워진다. 그 감지기가 내게는 속도다.
요점은 자료나 속도가 아니라 자격이다. 당신들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노라는 자신감 없이 - 설령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 글을 완성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 자격은 남이 내게 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나만이 내게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유선경 작가의 <어른의 어휘력>을 읽다가 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요점은 자격이다. 어쩌면 나는 자격 없는 글을 써온게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들었나 보다. 자료도 자료지만, 이런 글을 써도 되는 삶을 살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그런 두려움.
근데 또 안다. 글이라도 안 쓰고 살았더라면, 더 형편없는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래서 이제 동굴 밖으로 기웃거려 보기로 했다.
그렇다. 새로운 연재를 한다는 걸 참 길게도 썼다.
뭐 그렇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