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살의 장래 희망
나이가 들면 서글퍼진다. 왠지 모르겠지만 서글퍼진다. 제일 서글퍼지는 건, 그냥 이렇게 살다가 그냥 이렇게 가나 보다 싶을 때. 그리고 남들도 그러려니 생각할 때.
어릴 때는 다들 그렇게 지겹도록 물어왔다.
‘OO는 꿈이 뭐니?’
’너는 커서 뭐고 싶니?’
장래 희망 같은 게 없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런 질문도 다 한 때였다. 애초에 그런 건 진로상담할 때나 필요한 것이었을까. 대학 입학 이후로는 뚝 끊겼다. 점수 맞춰서 학교 정하고, 그 중에서 최대한 적성에 비스무리한 학과를 들어가고 나면, 이미 삶이 90% 정도는 다 정해진 것 마냥, 아무도 묻지 않았다.
대학 졸업을 하고 나고 좀 백수를 하면서 들어본 거 같기도 하다. 그때는 궁금함이라기 보다는 힐난에 가까웠던 거 같기도 하다.
인간이 역시나 삐딱하다. 그렇게 다들 물어볼 때는 귀찮더니, 막상 아무도 안 물어보니 서글프다.
하긴, 내일 모레 반백살에게 저런 걸 물어보기는 피차 면구할지도 모른다. 사실 딱히 대답할 것도 없다. 그리 대단한 꿈이 있는 건 아니니까.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봤는데, 없는 편에 더 가깝다).
어느 순간, 우리는 그냥 그런 존재가 된다.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존재. 예전의 그 가능성은 소멸하였으되, 그대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 남들이 우리를 그렇게 평가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 레이몬드 챈들러의 단편 소설 속에는 그런 인물이 있었다. 십년 째 소설을 쓰고 있다면서 정작 한 편도 쓰지 못하던 남자. 예전에는 그 남자가 꽤나 한심해 보였다. 말뿐인 인간. 꿈 속으로 도피하는 인간.
그러나 과연 그런가. 말뿐이라도 좋지 않은까. 부박한 인생에서 뭐라도 하나 품고 사는 인간을 마주하는 건, 요즘들어 꽤나 귀한 경험이다. 오히려 저런 남자라도 레어템이라서, 눈여겨봐주고 싶다.
그러니 가능성이 소멸했다는 건 맞지 않다. 가능성의 범위가 줄어들었을 수는 있으나(인정하자. 이 나이에 갑자기 프로 복서나 댄서가 되는 건 적어도 스무살의 내가 꿈꾸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적다.) 가능성이 소멸한 것은 아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가능성’을 품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그게 문제가 아닐까.
시간을 살아낸다는 것은 그냥 살아가는 건 아니다. 그냥 살아가는 순간들 안에도 어떤 변화를 담아낼 수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래서 말이다.
나는 여전히 내가 커서 뭐가 될지 궁금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당신이 커서 뭐가 될지도 궁금하다.
간만에 만난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냐?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미친….”
그러다 웃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웃는 게 또 간만이라, 그 또한 좋다.